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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작 /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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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작 /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 은희경

입력
2002.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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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의 학교생활단 한 번만 보아도 누구나 소라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봄가을로는 소풍날에나 신어보는 양말을 소라는 사계절 내내 벗은 적이 없었고 누군가 많은 시간을 들여 손질해줘야 하는 땋거나 꼬아올린 머리에 리본을 달았으며 가을이면 체크무늬 모직 점퍼스커트를, 여름이면 소매가 봉긋 올라간 아사 원피스를 입었다. 보풀이 잔뜩 일어난 털조끼에 무릎이 튀어나오고 복사뼈가 드러나는 해진 바지를 입은 부스럼투성이의 빡빡머리들, 그리고 일자로 이마를 덮는 상고 단발에 나일론 통치마 차림의 촌 아이들 틈에 있을 때가 아니라도 그랬다. 촌 아이들을 깔보는 읍내 아이들이 대개 운동화를 신었다면 소라는 분홍색 에나멜 구두를 갖고 있었다.

장래 희망을 적어내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선생님 간호원 과학자 또는 대통령 따위를 써냈지만 소라는 이 세상에 있는 책을 모두 읽은 사람이라는 다분히 인문적이고 독창적인 답변을 적었다. 한 해 전에는 선생님조차 어리둥절하게도 북구 외교관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고, 열 살이었던 그 전 해 역시 프리마돈나라는 낯선 외래어를 써서 시골 아이들로 하여금 콧방귀를 뀌게 만들었다.

짓궂은 남자아이들로부터 수난을 겪는 것이 소라에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지난해 겨울을 소라는 쉽지 않게 넘겼다. 지형적으로 눈이 많은 고장인 만큼 촌 아이들의 귀가를 걱정해 학교가 일찍 파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창 밖에 눈이 뿌리기 시작하면 아이들 모두 환호성을 질렀는데, 특히 남자아이들은 방과 후에 눈덩이를 뭉쳐 들고 소라가 교문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자는 뜻으로 은밀히 눈을 맞춰가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처녀 선생이 소라를 불러 상담했다. 왜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니? 부모님이 친구를 골라서 사귀라고 하시니? 아니에요. 그럼 왜 그래? 더럽고 가난하다고 친구들을 깔보는 거야? 상대가 원하는 정답을 맞힐 수 없어 난처해진 소라는 꽤 오랫동안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아무 대답을 듣지 못하자 처녀 선생은 그것을 작문 숙제로 내주었다. 숙제라는 말에 소라는 마치 일 중독자처럼 곧바로 그 내용을 공책에 받아적었으며 적극적인 문제해결 의지를 보였다. 참 그리고, 출석부에는 이름이 소연이던데 왜 다들 소라라고 부르지? 처음에 할아버지께서 소연이라고 지어주셨는데 엄마가 소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소라가 더 쉽고 예쁘다고 그렇게 부르게 됐어요. 소라는 처녀 선생을 두려워한 만큼이나 신뢰했고 때로 비굴한 태도마저 보였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모범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진 당당함을 무조건 신뢰해버리는 소극적 파괴본능을 갖기 때문이었다.

전학 온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변소와 담벼락에 누구누구는 연애대장이라는 낙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전학생 소년의 인기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소라의 이름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학생 소년이 소라에게 보내는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전학생 소년은 어쩔 수 없는 시골 소녀이면서 인형옷 같은 옷을 입고 굳이 유식한 표현을 골라 쓰며 자신이 받고 있는 선망과 질시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소라에게 가벼운 동정 그리고 냉소를 품고 있었다. 자기에게 모아지는 여자애들의 관심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학생 소년에게 소라는 그중 하나일 뿐이었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남자애든 여자애든 촌구석 아이들한테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소라가 알 리 없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을 때의 여유에서 생겨나는 매력이 기만이나 모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11월에는 그해의 마지막 외부행사인 백일장 및 사생대회가 열렸다. 일찌감치 작문을 완성하여 심사본부에 제출한 소라는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혼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앉기에 적당한 풀밭을 발견했다. 뻗은 다리를 책으로 가리고 앉은 소라는 어디선가 전학생 소년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한 손으로 앞머리를 한 번 쓸어올린 다음 두 팔을 뒤로 짚은 채 고개를 젖혀 마치 흘러가는 구름에 반했다는듯 갸웃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갑자기 소라의 얼굴 위로 뜨겁고 강렬한 통증이 쏟아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등 뒤에 있던 나무더미가 무너지면서 통나무 한 개가 소라의 얼굴까지 굴러떨어졌던 것이다. 정신을 잃는 순간 소라는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오는 발소리 속에 희미하게나마 박수와 웃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소라의 얼굴로 굴러떨어진 나무더미는 목부가 단단히 쌓아놓은 더미였으므로 그것을 움직이려면 여러 명이 함께 밀었으리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처녀 선생은 이 기회에 변소와 담벼락을 도배하는 극성스러운 낙서광도 함께 밝혀내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동안 가난과 역경 속의 아이들을 누구보다 큰 이해심을 갖고 열심히 지도해온 처녀 선생의 예상과 달리 아이들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회에 참가했던 아이들을 한 사람씩 불러 물어봤지만 쿵 소리가 나서 달려가봤더니 소라가 쓰러져 있었다는 식으로 대답이 거의 비슷하여 비밀을 지키려는 집단적인 모의의 기미가 분명히 느껴졌다. 다들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하고는 있었지만 조금씩 흥분돼 있는 품이 소라의 수난을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소연의 결혼생활

소연의 남편은 단정하고 여성스러운 소연의 분위기에 호감을 느꼈다. 소연은 유복한 가정에서 조금 엄격한 편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한 뒤 자신을 만나기까지 겨우 여섯 번의 미팅을 했을 뿐 별다른 연애 경험도 없이 착실하게 외국어학원과 서클룸을 오갔다. 문학이나 음악, 예술, 어떤 화제에도 탄력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교양을 갖추었고 화려한 용모는 아니었지만 어느 자리에서건 빠지지 않는 세련된 미적 감각을 갖고 있었다.

결혼생활은 소연 남편의 예상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몇 년간 소연은 행복한 결혼을 위해 갖가지 재능과 노력을 쏟아부었는데 그것은 스스로 행복을 누렸다기보다 소연의 특기인 연출이라고 해야 옳았다. 집 안은 유행에 따른 각종 아기자기하고 불필요한 장식품으로 넘쳐났고 휴일이면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아이스박스에 과일과 맥주를 채워 유원지로 나갔고 정기적으로 극장과 연주회장, 유명한 레스토랑을 예약했으며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꽃과 포도주를 주고받았고 저녁을 먹은 뒤 베란다에 꾸며진 코지 코너에서 부부찻잔으로 차를 마시는 동안 소연의 남편은 소연이 자기에게 주는 것보다 요구하는 게 너무 많다는 불만에 빠지기 시작했다. 소연이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던 가정이란 훨씬 더 자기 쪽에 편리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연애 시절 언제나 소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일을 차단했던 소연의 남편은 소연이 사람 대하는 일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것을 결혼 후에야 알았다. 시댁 식구들은 물론이고 아파트 경비원과 청소 아줌마까지도 피해다니기 일쑤였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일단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장점을 발견하려는 소연의 사고의 탄력성은 놀라운 데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쉽게 고르지 못하고 오랜 시간 망설이는데다가 자기가 고른 물건을 점원이 제대로 챙겨넣지 않았을까봐 근심해야 하는 소연은 쇼핑을 즐기지 않았다.

소연의 남편이 새로 옮긴 부서의 일로 사흘 동안 지방 출장을 다녀왔던 날 소연은 빨랫감을 정리하다가 남편에게 비밀이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소연의 남편이 상상하는 대로라면 소연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앓아누웠겠지만 소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소연은 자기에게 닥친 일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구조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소연은 자신이 남편에게 매력을 잃은 것이므로 남편만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판정을 내리고 개선책을 찾기 시작했는데 결국 남편과 자기 자신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는 현명한 적응력을 보여준 셈이었다.

소연은 얼마 전부터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현우라는 기자를 알고 있었다. 그 기자는 도덕성을 지켜야 할 고위 공직자들의 수뢰 사실을 보도할 때와 사이비 교주가 여신도들에게 혼음을 강요했다는 기사를 내보낼 때 두 번이나 이 세상에 진실은 없는 것 같습니다라는 멘트를 했다.

소연의 직장생활

소연은 많은 점에서 전임자들과는 달랐다. 몇 년째 아이디어만 기안해 올리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업무 몇 가지를 맡더니 일주일을 꼬박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서 그 동안의 업무 경과를 죄다 파악한 뒤 기어이 혼자 힘으로 그 일을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그 일은 회사의 주업무와는 관계가 없는 일로 급하지도 않았고 굳이 진척시킬 이유도 없었으며 실은 명분만 놓아두고 벌이지 않는 편이 회사로서도 이득인 그런 성격의 업무였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진행시켜놓은 바람에 번거롭게만 됐는데도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은 물론 남들도 모두 감탄하고 있으리라는 짐작에 쓸데없이 겸손해하는 소연을 동료들은 뜨악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소연은 부분적으로 매우 유능한 데가 있었지만 전체 흐름 속에서 일의 중요도를 판단하여 조직 내에 적절히 순서를 정하고 조율하는 면에는 몹시 서툴렀다. 팀을 이루어 하는 일에서는 자신이 담당한 부분적 역할을 필요 이상으로 완벽하게 완수해 보통으로 일한 사람들의 단점을 확 드러나 보이게 만들었다.

동료들을 결정적으로 어처구니없게 만든 것은 회식 때 소연의 분방함이었다. 술을 잘 마신다고 시원스럽게 대답하던 것과는 달리 소연은 금방 취해버렸고 자신이 얼마나 사교적이고 또 사회에 타협하는 닳고닳은 인간인지 주장하는 내용의 술주정을 펼쳤으며 직장에서의 성추행 같은 건 얼마든지 이해한다는 의미로 남자 동료들의 어깨를 툭툭 치기까지 했다. 소연의 독특한 캐릭터에 익숙해져 가면서 동료들은 더이상 소연을 경계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편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소라의 사회생활

젊은 화가 김영재가 화랑 운영에 손대보려고 하는 한 중소기업 사장과 그의 비서 소연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소연은 세련된 태도로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슨 말을 해야 자신이 이 자리에 도움이 될지 궁리하느라 잔뜩 긴장해 있었다.

김영재는 소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꽤 오랜 세월 동안 김영재는 어느 자리에서든 또래 여자와 인사를 나누게 되면 출신학교를 알고자 했고 드물게도 소연의 동창을 만나는 경우 빠짐없이 소연을 아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한번은 운좋게도 소연과 제법 가까웠다는 대학동기를 만나게 되어 소연의 결혼에 관해 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3학년 때 서클에서 만난 복학생 선배 하나가 너무나 열심히 따라다니자 적극적인 사람에게 잘 끌려가는 소연이 결국 졸업하자마자 식을 올리더라는 얘기였다.

소연씨 어린 시절 얘기 좀 해보세요. 귀여웠을 것 같은데. 안 그랬어요. 소연은 빈 술잔을 입술에 대고 깊숙이 기울였다. 어렸을 때는 너무 어른스러워서 아무도 귀여워하지 않았어요. 거꾸로 지금은 나이 든 어른이 애같이 유치하고 덜떨어졌대요. 전 친구도 없었지만 우리 엄마한테도 고민 같은 거 털어놓지 못하고 뭐든 잘하는 척 이미지 관리하면서 자랐어요. 어린 시절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만나기도 싫어요. 그건 나하고 같군.

사실 나는 촌놈이에요. 땅 한 뙈기 없는 빈농에서 구남매 중 둘째아들로 자랐죠. 누나들은 열 살만 넘으면 읍내로 식모살이를 갔는데 셋째누나가 들어간 집은 나하고 같은 반 여자아이네 집이었어요. 우리 식구들은 이듬해에 서울 변두리로 이사왔는데 누나들이 공장 일을 해서 나를 공부시켰어요. 방이 너무 작아서 식구들이 다 누울 수가 없었죠.

객실로 들어서며 김영재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셔야 했으며 소연을 침대에 조심스레 누인 뒤 구두를 벗기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준 다음에는 더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한동안 방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는데 마침내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술을 들이켜는 동안 김영재의 귀에는 오직 소연의 가냘픈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고, 마침내는 방의 불을 모두 끄고 소연의 옷을 벗겼다. 어둠 속에서 김영재의 희미한 얼굴 윤곽을 본 소연은 먼저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진지하게 해석해보았는데 그것을 김영재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여기기에는 자신이 여러 가지 여지를 많이 주었다는 판단이 들었으므로 마침내는 그가 너무 자책하거나 미안해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몸을 조금 움직여주었다.

소연이 가야겠어요라며 먼저 입을 열자 천장을 올려다보던 김영재의 입에서는 자연스러운 반말이 새어나왔다. 아직도 모르겠어? 뭘요? 네가 백일장 대회에서 다쳤을 때 약을 사다준 게 나야. 그리고 구두를 훔쳐다 버린 것도 나였어. 그때 너 다쳤을 때 나무더미를 밀어버린 게 누군지 알아? 낙서를 하고 다닌 것은 나였어. 네가 군수 아들 좋아하는 거 참을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나무를 밀었던 건 군수 아들 이현우였어. 이현우는 기억하겠지?

소연의 목소리도 나지막하고 담담하게 들려왔다. 인생은 반복되나봐. 한번 채인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어른이 되어서도 늘 비슷한 일들이 닥쳐오거든. 그때마다 어린 시절 학습된 대로 반응하게 되고, 결과는 똑같아. 소연은 가슴까지 끌어당겨 붙들고 있던 이불을 놓아버린 뒤 알몸을 드러낸 채 그대로 일어나서 옷을 하나씩 입기 시작했는데 서두르는 건 아니었다.

※ 이 글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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