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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분개하는 일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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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분개하는 일 있습니까

입력
2002.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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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누구보다도 정치적 자유에 민감했던 시인이다. 그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제목보다 첫 줄이 더 유명하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라는 시작부터 독자를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당당하지 못함을 자괴하는 시다.<…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부자유한 시대에는 비겁함을 자성하고 고백하는 데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1965년 군사정부 아래서 쓰인 이 시는 자유와 민주주의, 분개를 동류항처럼 묶는다.

누군가가 "지금 분개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당돌하고 맹랑한 일일 것 같다. 그러나 이 느닷없는 물음을 던진 곳이 언론사 면접 시험장이라면 수긍할 것이다. 일본 언론인 야스에 료스케의 칼럼 중에 '입사시험을 끝내고'가 있다.

면접장에서 그가 수험생에게 분개하는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언론인 자질을 엿보기 위한 평이한 질문이지만, 대개 당황하여 신문 제목 같은 대답 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수험생에게서 젊은이다운 열정이나 당당함을 보기 힘들어져 가고 있다. 전에는 면접하는 임원과 마르크시즘에 대해 거센 논쟁을 하다가 싸움으로 끝나고도 입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거의 그런 패기와 진지함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취직과 입학을 위한 면접시험의 철이자, 대통령 후보를 검증하는 대선의 계절이다. 대선 토론회는 면접시험과 같다. 토론회는 후보자의 정치적 식견과 비전, 열정, 현실에 대한 분노와 사자후의 경연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개별 후보 TV 토론회에서는 긴장도 분개도 열정도 보기 어렵다.

판에 박힌 듯한, 또는 유리한 답변을 끌어내기 위한 편파적 질문이 줄을 잇고, 앵무새 같은 답변이 반복되고 있다. 합동토론회가 마련되면 후보간 치열한 공방이 벌어져 국민의 관심이 달아오르겠지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측이 기피하고 있어 성사가 안 되고 있다. 논쟁이 없으니 후보의 장단점이 파악되지 않고 정책의 정부(正否)도 읽기 어렵다. 선거가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져 간다.

사적인 얘기라 양해를 구하자면,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내가 투표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일이 없는, 불우한 유권자다. 쿠데타로 잡은 무도한 권력을 혐오하거나, 3당 합당에 의한 태생적 불순함이 싫거나, 말을 뒤집는 집요한 집권욕이 밉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대선 때마다 유력한 정당이나 후보가 미워서, 가망 없어 보이는 후보에게 격려의 표를 주었다. 대선 때마다 느낀 갈등과 분노에 대한 변명일지언정, 이를 자랑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이번 대선에서 분노는 또 다른 형태로 찾아왔다. 민주당 의원들의 파렴치한 반란이 일찍이 시작됐다. 대선이 불리하다는 이유로 민주당을 탈당하는 것은 개인차원의 행동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의 탈당은 가뜩이나 일천하고 빈약한 우리의 정당사를 다시 한 번 유린하는 행위이다. 민주당은 지역주의의 병폐에도 불구하고 가장 민주주의적 전통을 지닌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정당으로 가는 탈당파도 있고 중부권 신당을 만들려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정당정치를 무력화 시키거나, 망국적 지역주의 위에 또 하나의 신당을 보태는 것이다.

우리 정치는 희망을 주기보다, 배신에 대한 분노를 타오르게 하는 기름탱크가 되어 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며 이어지는 탈당 행진이 개탄스럽다. 현란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차적 목적은 금배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유권자가 깨어 있다면 선거 때 그들의 행동을 표로 심판해야 한다. 최소한 유권자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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