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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44)파시오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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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44)파시오나리아

입력
2002.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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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12일 '파시오나리아'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스페인 노동운동가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94세로 작고했다. 파시오나리아는 시계꽃을 가리키는 스페인어다. 어원적으로 '수난의 꽃' 또는 '정열의 꽃'을 의미하는 파시오나리아는 이바루리가 이것을 필명으로 사용하며 공산주의 선동가로 맹활약한 1930년대 이후 전투적인 여성 혁명운동가라는 의미를 새로 얻게 되었다.바스크 지방의 갈랴르타에서 광산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이바루리는 1930년대 스페인 공산당과 인민전선 정부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스페인 내전 시기에 그녀가 방송을 통해, 또는 전장을 누비며 토한 사자후는 프랑코 반란군에 맞서 싸우는 공화주의자들에게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내전 발발 직후 공화파 정부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하러 파리에 간 이바루리는 한 연설에서 "스페인 민중은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멕시코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에게서 차용한 이 선언은, 이바루리가 또 다른 연설에서 발설한 "그들(파시스트들)은 (전선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No Pasaran!)라는 간결한 문장과 함께, 내전 내내 공화파의 슬로건이 되었다.

그러나 내전은 파시스트들의 승리로 끝났고, 이바루리는 소련으로 망명했다. 그녀는 그 망명 생활이 38년이나 계속될 줄을 결코 몰랐을 것이다. 망명 중에 그녀의 유일한 아들인 루벤 이바루리는 소련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바루리가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프랑코가 죽은 뒤인 1977년이었다. 그 해에 스페인에서 치러진 41년만의 민주적 총선에서 그녀는 82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41년 전의 총선은 이바루리가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했던 선거였다.

고 종 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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