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 김민종의 대타로 캐스팅된 것이 1992년 11월이니, 이제 딱 데뷔 10년이다. "첫날 촬영한 후에는 이게 아니구나 싶었다. 못하겠다는 얘기를 할 수 없어 꾸역꾸역 버텼다." 흔히 "네가 동건이냐"고 말할 때 '동건이'는 잘 생긴 남자를 이르는 보통 명사. 그러나 그는 이제 은근히 연기 맛을 알아가는 배우로, 자세가 좋은 배우로 충무로의 캐스팅 1순위가 됐다. 제7회 부산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 14일 레드 카펫을 밟게 될 '해안선'(감독 김기덕)의 주연 배우 장동건(30)을 만났다.
―예쁜 여자가 "살 좀 찌고 싶다"는 말할 때, 그리고 장동건이 "잘 생긴 내 얼굴 부담스럽다"고 말할 때, 참 얄미운 거 알고 있나.
"97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직전, 대체 이 얼굴로 무슨 배역을 맡겠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이젠 생각이 정리됐다. 얼굴이 잘 생기면 하고 싶은 배역을 빨리 잡을 수 있다. 그건 행운이다. 그러나 그걸 유지시키는 것은 배우의 진정성이다. 좀 어눌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는 게 진짜 배우다.
―하지만 엔터테이너란 내심을 속이고 대중에게 만들어진 모습을 보여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진정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자책감에 몹시 괴로울 때가 한 때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게 연기자의 숙명이란 생각이 든다. 자기와의 감정 싸움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보자. 10년을 돌아보면 언제 가장 기고만장했었나.
"배우로서 전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늘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캐치하려고 노력하고 알고 있다. 음? 이게 바로 기고만장?"
―94년 인기절정에서 학교(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진학하고, 또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고…. 데뷔 10년간 지속적으로 발전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 동안 뭐 제대로 한 게 없어서 그런가. 하하. 연기 10년을 돌아보니 세 단계로 나뉘는 것 같다. 데뷔후 2년간 그저 시키는대로 TV 앞에 섰다. 연극원 진학 후 연기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달라졌다. 그 영화에서 '나'는 없었다. 그저 감독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만 충실히 쓰임을 당하고 보니 부쩍 성장했다."
―'해안선'을 빼고 장동건 인생의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당연히 '인정사정…'이다. 그건 내 인생의 '첫 영화'다. (실제 데뷔작은 96년 '패자부활전') 주위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하느냐"며 극구 말렸던 '친구'도 잊지 못한다. '친구' 이후 할 수 있는 배역의 폭이 넓어졌다. 그리고 나선…. 근데 참 영화 한 것 없네."(지금까지 출연작은 8편)
―'친구'의 곽경택감독과 유오성이 이젠 '원수'가 됐다. 중간에 선 입장이 어떤가. 연예인은 대개 자신이 착취당한다는 피해의식 같은 게 있지 않나.
"직장인이 조직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우리들은 인간관계에서 그런 걸 받는다. 이런 갈등은 구조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맘이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다."
―이명세 감독이 정교한 영화작업을 한다면 김기덕 감독은 그 반대가 아닌가. 더욱이 김기덕 감독 영화에서 배우가 돋보이기란 쉽지 않을텐데. 손해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
"호흡과 템포의 차이는 확실히 있었다. 감독이 명령을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감독의 요구에 술술 따라가게 되더라. 상업 영화는 배우가 돋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그냥 감독의 세계에 온전히 녹아 들기만을 바랬다."
―멜로적으로 생겼다는 콤플렉스 때문인가, 왜 자꾸 군인 영화만 하나.
"그런 면이 있다. 군에는 못갔는데(기흉으로 군면제) '해안선'에 이어 강제규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12월부터 또 촬영한다. 시나리오가 맨날 나이스가이나 멜로 영화 주인공만 들어오는 것은 불만이다. 아직은 선이 굵은 영화적인 영화가 좋다."
―장동건도 스트레스 받나. 착하다고 소문났던데.
"남들이 화가 날 때 나도 화가 난다. 하지만 화내는 것은 싫다. 어쩔 수 없이 화를 낼 때는 화내는 내 모습에 또 화가 난다. 스트레스? 물론 받는다. 미국으로 여행을 자주 간다. 익숙하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곳이 좋아서. 그리고 요즘은 모임에서 술을 좀 많이 마신다. 안성기 선배가 만든 남자 배우 모임인데, 한석규 정우성 이정재 이런 배우들과 한 달에 한 번 술마시며 얘기를 하는 데 배우는 게 많다. 나에게는 그들이 직장 동료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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