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식 경영행태는 이제 시장이 용납하지 않는다.'재벌들의 경영권이 창업 세대에서 2·3세로 대물림하는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승계과정과 경영행태에 대한 시장과 투자자들의 심판이 엄격해지고 있다. 한국 재벌의 병폐로 지목되는 편법적인 부의 상속이나 재벌 2·3세의 무리한 공격 경영의 조짐이 나타날 경우 주식시장이 주가하락을 통해 가차 없이 제재를 가하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2세 경영기업 이라도 경영성과가 만족스러울 경우에는 주가는 상승세를 유지, 지배구조보다는 경영실적이 우선임을 보여주고 있다.
■2세 공격경영 유보적 평가
올들어 증시에서 가장 주목 받은 2·3세 경영인은 SK 최태원 회장과 롯데 신동빈 부회장. 일찌감치 후계구도를 갖춘 이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굵직굵직한 사업을 잇따라 인수하며 몸집을 불려가고 있지만 시장의 평가는 유보적이다. SK는 올해 KT지분 인수전에 뛰어들었다가 오히려 손해를 봐야 하는 지분 맞교환 논란에 휩싸였으며, 전북은행 카드 부문와 외환카드 인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주가는 출렁거렸다. 또 최근 팍스넷 인수에 이어 현대·대우증권 인수설도 나오면서 그룹 대장주인 SK텔레콤 주가는 힘을 잃은 채 올 1월초보다 13.2%나 빠졌다.
신동빈 부회장이 전면에 나선 롯데의 확장경영에 대해서도 외국인 투자자들이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올 8월 그룹의 러시아 호텔·백화점 사업에 계열사들이 108억원씩을 지원키로 한 이후 경영 불투명성이 부각되면서 롯데칠성 롯데제과 롯데삼강 등 '롯데 3인방' 주가는 폭락했다. '가치주'로 각광받으며 90만원에 육박했던 롯데칠성 주가는 58만원까지 떨어졌다. 상장 계열사가 신격호 회장의 부동산 28억원을 사들이고 동양카드를 인수하면서 투자자들 사이에선 '롯데리스크'라는 말까지 나왔고 외국인들은 주식을 내다 팔았다.
■편법적 승계 부정적 반응
현대백화점도 10월 초 발표한 기업분할이 2세 경영승계 수단으로 비쳐지면서 주가가 3월 대비 57%나 폭락했다. 대주주인 정몽근 회장이 장남 정지선 부회장 형제에게 회사를 물려주기 위해 분할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37%를 넘었던 외국인 지분율은 3개월 만에 25%로 줄었다. 신세계도 이명희 회장의 장남 정용진 부사장이 최대주주(보유지분 52%)인 광주신세계를 독립법인으로 만들어 올 2월 증시에 따로 상장하면서 주가가 고점보다 34% 하락했다.
경영권 승계가 이뤄진 기업 가운데 주가 상승률 1위는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 고 장상태 회장의 장남인 그는 지난해 9월 회장으로 취임, 재무구조 개선과 내실 경영 등으로 올해 창사이래 최대 실적을 거두며 3세 경영을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0년 1,497억원 적자이던 기업을 지난해 1,073억원 흑자로 바꾸어놓았고, 올해 증시침체에도 아랑곳 않고 주가는 연초보다 44% 올랐다.
반면 두산은 경영권이 그룹 3세대에서 박정원 사장 등 4세대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불거진 신주인수권부사채(BW)발행을 통한 편법증여 의혹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주가도 연초보다 48.8% 떨어졌다.
■흑묘백묘(黑猫白猫)론
과거와는 달리 최근 증시에선 경영권 세습 자체 보다는 경영권 승계 과정의 투명성과 경영성과를 더 중시하고 있다.
그동안 상속을 위해 편법을 쓴 회사들이 너무 많다는 '원죄' 때문에 투자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재벌 2·3세대든 전문경영인이든 경영성과만 잘 내면 좋다는 '흑묘백묘론'이 더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대투신증권 박주식 리서치센터장은 "2·3세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과정은 투명하고 공정한 룰을 지켜야 한다"며"외환위기 때 해태 등 많은 기업의 2·3세들이 방만한 경영으로 몰락한 만큼 시장의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우증권조재훈 투자분석팀장은 "한국형 '패밀리 경영'의 성공여부는 경영권 승계의 정당성과 경영 능력에 달려있다"며 "2·3세로 넘어가는 기업의 변화와 지배구조의 투명성 여부는 앞으로도 한국 증시의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