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부쩍 두 아이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큰 애를부르는데 정작 입밖으로 나오는 것은 둘째 이름이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큰 애 얼굴을 보고있으면 우리 삼남매 이름을 마구 바꿔 불렀던 친정엄마 생각이 절로 난다.언니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큰 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 떠는 건 둘째도 마찬가지다. 괘씸하기도 하고 면구스럽기도 해 궁리 끝에 그럴싸한 핑계를하나 찾아냈다. “너희들 낳느라고 엄마 IQ가 낮아져서 그런 거야.”
아이 하나 낳을 때마다 20씩 낮아진다는 것이 정설(?)이니 엄마 IQ에서40을 빼면 두자리 아니냐, 그러니 너희들이 너그럽게 이해해달라는 애절한마음이었는데, 둘째는 야박하게도 "그럼 아이 여섯쯤 낳은 엄마는 IQ가 아예 마이너스겠수“라며 정곡을 찌른다.
뭘 가질러 부엌에 갔다가 생각이 안나 물만 마시고 오는 일도 종종 생긴다. 주부건망증이라더니 이거 내가 그거 아니야 싶어 심란해진다. 전화받다가 냉장고를 열고는 전화기를 무심코 그 안에 넣어놓았다는 사람, 아들주려고 볶음밥을 만들다가 왜 볶고 있는지를 잊어 자기가 먹어버렸다는 사람, 결혼예물을 라디에터 박스에 모셔놓았다가 그 사실 자체를 잊어버려집수리때 겨우 찾았다는 경우는 고전에 속하고, 거래처에 돈 부쳐주라는남편 부탁을 까먹어 상대방을 부도 위기로까지 몬 적이 있다는 아줌마를만난 적도 있다.
주부들이 겪는 이같은 유사치매 현상은 사실 뇌기능 자체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보다는 다양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운가사노동의 속성 자체가 사람을 그렇게 정신없이 만든다는 것이다.
청소, 빨래, 식사준비처럼 일상적인 노동에서부터 각종 공과금 내기, 쇼핑, 집안 대소사…. 그뿐인가, 공교육이 무너진 지금, 우리 아이에게 딱맞는 학원 찾아내는 일도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거기다 집안에 고3 수험생이라도 있으면 엄마의 IQ는 거의 환상적으로 낮아진다. 고2짜리 아들을 둔 친구는 “내년엔 고3 엄마라고 명함에 새겨 갖고 다닐꺼야. 그러면 정신없이 굴어도 사람들이 이해해 준다더라”고 진담처럼 말한다.
문방구 들르기가 취미인 둘째를 따라가 예쁜 수첩 몇 개를 골랐다. 한 장에 하루씩 날짜를 기입하고 하루 일과를 매일 정리하기로 했다. 냉장고에도 백지 한 장을 붙여놓고 사야할 물건들을 생각날 때마다 메모하고 있다.
“집안 살림에도 경영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거나 “주부도 프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유난히 실감나는 요즘이다.
/이덕규(자유기고가) boring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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