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해도 사람을 죽을 만큼 때릴 수는 없는 겁니다."검찰의 가혹행위로 인한 피의자 사망사건을 계기로 구타, 잠 안 재우기, 밀실수사 등 검찰의 구태의연한 수사관행을 질타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법조계 내외에서는 이번 피의자 사망사건이 특정 수사관의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언젠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예견된 사고'라는 주장이 거세다. 검찰의 가혹행위가 마약사범, 조직폭력배 뿐 아니라 참고인, 무고한 일반시민에게까지 가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특조실
구미숙(丘美淑·35·충남 보령시)씨는 교도소에서 2년째 허리통증을 진통제로 달래고 있는 남편 김재석(金載錫·38)씨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김씨에게 재앙이 닥친 것은 다름 아닌 숨진 살인용의자 조모(30)씨가 구타 당한 서울 지검 11층 특별조사실. 2000년 8월18일 새벽 충남 보령시 자택에서 범죄단체 조직 혐의로 서울지검으로 붙잡혀온 김씨에게 특조실은 지옥 그 자체였다.
"알몸으로 무릎을 꿇어야 했고, 수갑이 채워진 채 7시간 동안 야구방망이 등으로 맞았어요. 할 수만 있다면 11층 조사실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었어요." 남편의 증언을 전하는 구씨는 몸을 떨었다. 검찰의 가혹행위로 발가락이 부러지고 척추 1번과 5번이 탈골했다고 주장하는 김씨는 지난해 8월 담당 검사와 수사관 5명을 형사 고발했다.
만연한 가혹행위
인권단체는 검찰의 가혹행위가 강력범 뿐 아니라 일반시민, 참고인에게도 가해질 만큼 고질적 병폐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 검찰 수사관도 "어떤 혐의의 피의자이든 기선제압과 수월한 조사를 위해 어느 정도 구타를 하는 게 수사관들 사이에서 정석으로 통한다"고 전했다.
1999년 10월 초 제주에서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로 음향기기 시장조사를 나왔던 양모(39)씨는 영문도 모른 채 검찰수사관에게 봉변을 당한 경우. 강도 용의자로 오인돼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 양씨는 "도대체 누구냐, 왜 이러냐"고 항의하다가 구타를 당했다. 진짜 용의자가 잡혀 40분만에 풀려난 양씨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공포에 떤 40분간의 악몽을 잊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검찰에 의해 절도 혐의가 씌워졌던 한 50대 남자가 99년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강압적으로 수사해 너무 힘들었다"며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지난해 인천국제공항 유휴지 사업자 선정 특혜의혹 사건과 관련,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공항공사 개발사업팀장 양모(53)씨는 "48시간 조사를 받으면서 잠은 4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며 "수사관이 대답을 잘못하면 주먹으로 배를 때리곤 했다"고 주장했다.
■증거위주 수사 관행 만들어야
그러나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수사 관계자들의 시각은 다소 엇갈린다. "담당 검사와 수사관들이 재수가 없었다"는 반응이 검찰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한 검찰 수사관은 "인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과학수사로만 강력범들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이번 사건으로 검찰을 너무 몰아 붙이면 검찰의 강력범죄 대처가 위축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
하지만 다수의 법조계 인사와 인권단체는 이번 사건을 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검찰의 고질적인 수사관행과 더불어 사법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인권실천시민연대의 오창익(吳昌翼) 사무국장은 "검찰은 철저하게 폐쇄된 인권 사각지대"라며 "검찰 수사가 과학 수사보다 피의자 자백 위주로 수사를 하고 있는 풍토에서 당연히 가혹행위가 뒤따른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도 "증거위주의 수사관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법원은 강압수사로 인한 자백을 인정하지 않는 원칙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최기수기자 mounta@hk.co.kr
■ 전직 검찰수사관의 증언
"피의자를 끌고 특별조사실로 들어가 철문을 '쿵' 닫으면 상황 끝이죠. 피의자의 인권이나 수사원칙 등은 딴나라 얘기가 돼 버립니다. 특조실 분위기에 눌린 범인이 내 앞에서 파르르 떨며 겁에 질려 갈 때 '딱 한 대만 때리면 술술 불겠구나'하는 유혹에 빠지게 되죠. 그래서 때리게 되는 것 같아요."
2000년부터 2001년까지 2년간 서울지검에 파견돼 검찰수사관으로 활동했던 서울의 일선 경찰서 박정근(39·가명) 경위는 "구타가 살인이나 조직폭력 등 강력범죄 수사에 가장 애용되는 수사기법의 하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며 "솔직히 홍경영검사나 다른 수사관들이 재수가 없었다는 생각 밖에 안든다"고 털어 놨다.
"당장 서울지검의 수사관들의 책상만 뒤져 보세요. 야구방망이와 죽도가 수두룩하게 나올 겁니다. 그게 다 뭐하는 데 쓰는 것이겠어요?" 그는 구타와 가혹행위에도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고 귀띔했다. "구타의 철칙은 외상을 남겨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머리나 가슴 등은 절대 손대지 않습니다. 절대로 상처가 남지 않는 급소들을 찾아 가격해야 합니다. 구타가 효과가 없을 때는 잠 안재우기나 얼차려 등 다른 방법으로 바로바로 넘어가야 해요. 그래야 생명에 지장이 없죠. 그래서 수사하는데 시간이 좀 여유로울 때는 구타보다는 잠 안재우기 등의 방법을 훨씬 선호합니다."
그는 수사관들의 구타행위는 검사의 지시나 묵인 아래 이루어 진다고 주장했다. "직접 '조져'하면서 구타나 가혹행위를 지시하는 검사도 몇몇 있고 또 직접 때리는 검사도 있지만 이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은근히 구타를 부추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검사가 직접 조사를 하다가 일어나면서 '3시간 후에 올 테니 그 때까지 이야기 받아 놓으라'고 말하면 그건 '패서라도 자백을 받아 놓으라'는 뜻이죠."
그는 이번 사건이 "과학적인 증거 수사 대신 구타나 가혹행위에 의한 안이한 자백위주의 수사에 매달려 온 검찰 수사의 결과"라며 "이런 악습을 없앨 소중한 기회로 여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과학적인 수사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 등은 보강하지 않은 채 '증거위주 수사를 하라'고만 요구하면 수사력은 힘을 잃고 강력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철기자 kimin@hk.co.kr
■ 개선책은
수사기관의 강압적 수사관행을 뿌리뽑기위해서는 피의자 인권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은 물론 수사기관의 수사관행이 획기적으로 개선돼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강압수사의 온상처럼 지적되는 것은 이른바 '짜내기'로 불리는 자백위주의 수사관행.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을 경우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치면 수사관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백을 받아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처하게 마련이다.
이번 사건도 수 년 전 살인사건에 대한 초동수사가 미진한 상황에서 용의자를 일단 체포해놓고 무리하게 자백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였다.
제도적 개선책으로는 철야수사 금지 및 조사·심문시 변호인 입회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김선수(金善洙) 변호사는 "우선 이번에 문제가 된 비밀조사실을 폐쇄해야 하고 보다 근본적으로 변호인을 심문과정에 참여시킴으로써 가혹행위가 가해질 여지 자체를 차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압수사 근절을 위해서는 수사기관인 검찰뿐 아니라 법원의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서울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장기적으론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조서가 결정적인 증거로 인용되는 상황에서는 강압적으로라도 자백받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 개연성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또한 피의자가 법정에서 자백이 강압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할 경우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판례가 더 많이 나와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제도개선과 아울러 수사기관의 근본적 태도 변화 필요성도 제기된다. 경실련 고계현(高桂鉉) 정책실장은 "식민지시대 유산인 마구잡이식 인신구속과 강압수사가 군부독재 시절을 거쳐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며 "이번 사건을 일제 고등계 형사 수준의 수사마인드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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