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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89)국민회의 고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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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89)국민회의 고문 ①

입력
2002.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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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 후 나는 국민회의의 상임고문이 됐다. 원래 정당의 상임고문이라는 자리가 일상적 당무를 수행하는 자리가 아닌 데다 원외였던 까닭에 나는 현실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국민의 정부' 2년째인 1999년에 접어 들면서 여야 대립은 심화했으며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비판도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국회는 '국회 529호실 사건'으로 새해 벽두부터 파란에 휩싸였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98년 마지막 날과 99년 첫날밤 사이 국회 529호실이 '정치사찰을 위한 안기부 분실'로 악용되고 있다며 529호실을 부수고 들어갔다. 정부 여당은 이를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하고 이회창(李會昌) 총재를 포함한 관련자 전원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을 정하는 등 여야는 극한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1월5일부터 7일까지 사흘 연속 야당의 격렬한 반대와 육탄저지 속에서 법안, 결의안, 동의안 등을 무더기로 날치기 처리했다. 여야 대치는 더욱 격화할 수밖에 없었고, 국민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날치기에 분노했다. 박준규(朴浚圭) 의장으로부터 사회권을 넘겨 받은 국민회의 김봉호(金琫鎬) 부의장이 의장석이 아닌 본회의장 중간에서 여당 소속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무선 마이크를 들고 의안을 기습 처리하는 모습을 TV로 지켜 본 나는 전직 국회의장으로서 서글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4월7일에는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에 연루된 한나라당 서상목(徐相穆)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됐다. 292명이 참석한 이날 본회의 표결 결과 는 찬성 136, 반대 145, 기권 7, 무효 4 였다. 표결에 참여한 국민회의와 자민련 소속 의원만도 156명이어서 이들 가운데 최소 20명이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한 셈이었다.

정부 여당은 체포동의안 부결의 원인이 내각제를 둘러싼 두 여당간의 갈등에 있는 것으로 판단, 국민회의와 자민련 간의 공조체제를 복원하는 데 주력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곧바로 국민회의 조세형(趙世衡) 총재 권한대행과 한화갑(韓和甲) 총무를 경질하고 권한대행 후임에 김영배(金令培) 상임고문을 임명했다. 이와 함께 김 대통령과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리는 4월9일 회동을 갖고 내각제 개헌 논의를 8월말까지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국민의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공동여당은 또 다시 국회에서 여야 격돌 속에 의안을 강행 처리해 국민을 허탈하게 했다. 5월3일 밤 공동여당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등 6개 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많은 국민들이 공동여당이 추구하고 내세우는 정치개혁의 본질과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날치기로 통과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발효하고 5월24일 17개 부처 각료 중 11명이 교체되는 개각이 이뤄졌다. 사실상 '국민의 정부' 2기 내각의 출범이었다. 그러나 몇몇 부처 장관의 인선은 국민의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김태정(金泰政) 검찰총장의 법무부장관 기용은 야당 등으로부터 거센 비판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DJP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을 부채질하는 사건이 터졌다.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관부인 고급 옷 로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거짓말쟁이로 몰아 세우는 이들의 '진실게임'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분노했다. 이와 함께 정부의 도덕성과 개혁성에도 큰 흠집이 생겼다. '50년 만에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고 하지만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하는 여론이 국민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그런데도 정부·여당의 대처는 안이했다. 청와대측은 내사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사실 관계를 철저히 밝혀야 할 검찰도 미온적이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정치 도의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책임질 사람은 책임을 지는 정공법을 택했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여론을 되돌릴 수가 없었는데도 여권은 여전히 수습의 가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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