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두부가 있다. '흰'이라는 형용사는 사실 불필요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두부는 흰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작가의 눈은 두부를 보지 않는다. 그는 흰 두부를 본다. '콩밥을 먹다가' 막 출소한 남자의 수염에 늘어붙은 흰 두부 파편. 흰 두부는 누런 콩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지만, 다시는 콩으로 돌아갈 수 없다.그래서 두부가 다시는 옥살이하지 말라는 당부와 염원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71)씨가 산문집 '두부'(창작과비평사 발행)를 펴냈다. 1995년부터 2002년 6월까지 쓴 글 23편을 엮은 것이다. 박씨에게는 산문이라는 형식이,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잡문(雜文)'에 머무르지 않는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같은 그의 산문집은 이 글쓰기가 얼마나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얄팍한 감상에 젖는 것도 아니고, 비장한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다. 박씨는 말하자면 손톱으로 가슴을 긁는 것처럼 산문을 쓰는 작가다. 그 손톱이 만만치 않게 뾰족하다. 생채기가 생길 정도다.
5일 서울 나들이를 나와 만난 박완서씨는 날씨 이야기를 했다. 산문집에 관한 직설적인 질문에 다정하지만 길지 않은 답이 그의 글쓰기의 모양새와 닮았다. 그러다가 선거와 정치 얘기로 넘어가자 입심이 날카로워진다. 어느 한쪽 편들지 않으면서 마땅찮은 행태를 슬쩍슬쩍 꼬집는다. '두부'라는 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꼰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어느 시대고 범죄 없는 시대가 있을까마는 단지 그의 통치를 치욕스러워한 게 죄가 되어 그렇게 여러 사람이 콩밥을 먹고 그리고 두부를 먹게 된 기록은 생존한 대통령 중 아마 그가 최고가 되지 않을까." 그 무렵 출소한 사람에게 두부를 먹이고 헹가래를 치는 것을 보면서 작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가 옥살이를 하고, 그 옥살이를 영예스러워 했다면, 그 시대는 삐뚤어진 시대이지 온전한 시대가 아니다"라고 적는다. 사면되어 당당하게 출옥하는 전 대통령을 목도하면서 작가는 "입술 주변에 허옇게 두부 파편을 붙인 그를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한 모의 두부에 고개 숙이지 않는 세상은 "아직 멀었다."
산문집에서는 자신이 자리잡은 경기 구리시 아치울의 아름다운 자연과 고향 개성에 대한 그리움 같은 다감한 얘기들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박완서씨 산문의 묘미는 맛깔스럽되 목덜미를 차갑게 훑고 지나가는 서늘한 감각에 있는 쪽이다.
'가족'이라는 제목이 붙은 산문이 그렇다. 가족이라는 말은 얼마나 살갑게 들리는지. 박씨가 끄집어내는 것은 그러나 '우리 아닌 남을 밀어내고 해치려는 힘'이다. 중인 출신 고모부는 양반네인 처가에만 가면 자기가 죽일 놈이라고 탓을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군대로 소집된 고모부는 월남을 하고, 고모는 개성에 남은 채 휴전이 됐다. 고모부는 새 장가를 든 뒤에도 전(前) 처가에 와서, 북에 두고 온 처가 그립다면서 울먹였다. 박씨는 "그건 그냥 시늉처럼 보였다"고 잘라 말한다. 냉정한 평가다. 고모부가 실은 새 아내와 재미나게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 시늉이 새 아내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할 만큼 고모부는 "철없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박씨의 감정은 매섭다. 그것은 신세를 한탄하면서 주저앉으려는 인간의 안이한 관성에 발을 건다. "이런저런 추억을 공유하는 것을 가족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진짜 가족은 아닌 것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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