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전 충남 천안시 안서동. 경부고속도로 천안 톨게이트에서 300m 남짓한 곳에 위치한 이곳은 단국대 호서대 상명대 천안캠퍼스, 천안대와 천안외대 등 대학 5개가 밀집해 있다. 하지만 곳곳에 산재한 술집과 당구장, 전신주마다 나붙은 하숙·자취방 구인 딱지가 아니면 3만5,000여명의 대학생들이 북적대는 전국 최대 규모 대학촌임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지방 캠퍼스 대학생이라는 썩 달갑지 않은 현실을 20대가 시작될 무렵 받아들였던 이들은 거세게 몰아 닥친 취업난에 다시 한번 한탄과 자조 속에 빠져들고 있다. 젊은 청춘들의 발랄함이 묻어나야 할 대학촌 안서동은 그래서 항상 무겁게 가라 앉아 있다.■한탄과 자조 묻어나는 대학촌
안서동 일대 유흥가의 영업은 오후 들어 일찌감치 시작된다. 서울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백주(白晝)에 술에 취한 채 멱살잡이를 하는 풍경도 심심찮게 연출된다.
오후3시. 동아리 후배들과 어울려 일찌감치 소주에 김치찌개 안주로 술판을 벌인 한 4학년 학생은 벌써 눈자위가 풀려있다. "바쁘지않나요. 일찍 시작했네요"라고 묻자 "취업 못하는 3류대생은 술도 못 마시느냐"는 자조감에 찌든 격한 답변이 돌아왔다. 거리 한쪽에선 술 취한 학생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식당을 하는 주민 김모(45·여)씨는 "학생들 때문에 먹고 살지만 싸우고 떠드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자조를 넘어 '자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젊은이도 많다. 친구들 사이에서 '시체'로 불리는 서울 출신 유학생 김모(26)씨는 오후3시가 넘도록 원룸에 누워 있었다. 친구들은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지만 그는 3개월째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그의 유일한 낙은 밤을 꼬박 새우며 즐기는 PC게임이다. 새벽까지 게임을 즐기다 여명이 밝아오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든다. 그의 얼굴은 항상 누렇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방안엔 꽁초가 가득 담긴 패트병과 컵라면 용기, 흐트러진 이불이 되는대로 널려 있다. "어차피 제 실력으론 취업도 안됩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 일단 쉬고 싶습니다." 이른 절망감 속에 휘청대는 이들은 김씨 외에도 이곳 안서동에 많다.
안서동엔 1년에 300만∼350만원짜리 원룸들이 빼곡한 건물 100여동이 밀집해 있다. 아침이 되면 방 마다엔 술병이 수북하고 원룸 건물 이곳 저곳에선 희망 없는 청춘들이 계약 동거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달랜다. 호서대 권모(24)씨는 "아무런 제재가 없다 보니 오후에 잠깐 방에 들르면 수업도 거르고 함께 널브러진 커플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취직이요. 포기한지 오랩니다."
이 같은 자조의 뒤에는 체감 취업률 10%라는 지방대생들의 현실이 버티고 있다. 이들 대학의 지난해 공식 취업률은 60∼75% 선이다. 각 대학 취업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올해도 예년 수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원서를 낼 곳조차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술자리에서 만난 경기도 유학생 유모(26·호서대 4)씨는 취업 이야기를 꺼리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전공도 못 살리고 대충 떠밀려 하는 게 취직이냐"며 "대부분 영업 사원이나 보험 설계사, 학습지 교사가 되는 게 현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선배들의 경우 그나마 박봉과 고된 업무에 시달려 오래 버티지도 못한다"며 "봄에 잠깐 알아보는 취업률과 실제 취업률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차별이 적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천안대 이모(23·여)씨도 "취업률이 높다고는 하지만 취직한 선배나 친구 중엔 임시직이 많다"고 전했다.
단국대 도서관에서 만난 P씨는 "여덟번이나 떨어진 끝에 취직을 했지만 올해 초 그만뒀다"고 털어놓았다. P씨는 지난해 어렵게 자격증을 따고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중소 업체에 들어갔지만 자격증은 쓸모가 없고 영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취직한 친구들 중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애들이 꽤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천안대 졸업반 김모(25·서울 성동구)씨는 매일 오전6시30분에 일어나 아침을 거르고 강남역에서 출발하는 통학버스를 타고 등교한다. 1,2학년 때는 자취도 해봤지만 "더 이상 망가지기 싫어서" 그만 뒀다. 오후6시엔 강남역 부근 영어학원에서 토익과 영어 회화 강의를 듣는다. 김씨가 귀가하는 시간은 오후10시가 넘어서다. 자취를 하고 있는 장길만(25·단국대 전산과 4)씨는 최근 2,3시간만 잔다. 졸업작품과 취업 준비를 병행하느라 쉴 틈이 없지만 혼자 생활을 꾸려가기가 만만치 않다. 장씨는 "간혹 대기업에 붙은 친구가 있으면 마치 명문대에 진학한 것처럼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잘 나가는 애들은 학교에서도 신경을 많이 쓴다"며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애들이 많다"고 말했다.
단국대 취업 담당 부스에는 취업 상담과 입사 원서 및 취업 정보를 구하기 위한 학생들의 발걸음이 계속 되고 있다. 취업 담당자는 "학생들도 힘들겠지만 학교도 취업 특강, '교직원 1인 1기업체 방문' 등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얼마 전엔 한명을 취직 시키기 위해 업체를 찾아가 사정을 한 적도 있었다"며 "무엇보다 학생들이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천안대 관계자도 "채용박람회 등에 가보면 중소기업이 사람을 많이 뽑는데도 대기업만 선호해 '구직난 속 구인난' 현상이 벌어진다"며 "회사 정보를 꼼꼼히 모으고 눈높이를 낮춰 준비를 한다면 취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천안=고찬유기자 jutdae@hk.co.kr
■단대 천안캠퍼스 졸업준비위원장 김춘광씨
"졸업생 모두 취직하는 게 소망입니다."
단국대 천안캠퍼스 졸업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춘광(金春光·24·사진·공업학과 4)씨는 "올해는 취업난이 심각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학생들이 더 힘들어 한다"고 안타까워 했다.
지난해 11월 위원장에 당선된 그는 취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취업신문을 발간하고 자기소개서 작성법, 취업정보 사이트 등 취업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외부 강사를 섭외하고 취업 특강을 기획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는 남들의 취업을 위해 발로 뛰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취업 준비는 뒷전이다. "경험을 쌓으려고 시작한 일입니다. 영어실력도 중요하지만 대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졸업이 코 앞인데도 공부할 시간이 없어 가끔 답답합니다. 하지만 이왕 맡은 일인데 끝까지 최선을 다 해야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 그의 꿈은 탄탄한 중소기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솔직히 대기업은 욕심이죠. 일단 전공을 살려 중소기업 연구개발이나 생산관리 쪽으로 가고 싶은데…." 김씨는 "꿈이 작은 게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잘해야 결국 지방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게 현실이죠. 그렇다고 무작정 취업을 포기할 순 없잖아요."
그는 "특히 서울 수도권 학생들이 많아 이 지역 중소기업 취직을 꺼리고 무조건 서울에서 취직할 생각만 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며 "조금만 아래를 쳐다보면 취직할 곳은 아직 많다"고 아쉬워 했다.
"대기업에 들어가 좋아하던 친구가 결국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영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는 김씨는 임기 중 마지막으로 남은 졸업 앨범 기획에 여념이 없다.
/천안=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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