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가을에서 겨울로 옮아가는 한라산(1,950m) 백록담을 볼 수 있게 됐다. 예년(12월 1일∼익년 2월 28일)보다 한달 빠른 1일부터 백록담이 개방된 덕분이다.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는 9일부터 제주도에서 열리는 전국체전 등으로 관광객이 크게 늘 것으로 예상, 조기개방을 결정했다.
성판악(성널오름) 코스를 택했다. 출발지의 해발은 970m. 온통 안개다. 매표소 찾기도 힘들 정도다. 산행의 위험도 그렇지만 과연 백록담을 볼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매점 아주머니가 "한라산의 날씨는 워낙 요동이 심해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어요"라며 행운을 빌어준다.
5분 정도 걸으니 어느덧 안개가 옅어지면서 시야가 트이고, 대신 바람소리가 들린다. 소리만으로는 대단한 바람이다. 그러나 숲이 워낙 깊어서인지 머리 위로만 지나간다. 후두둑, 바람에 내몰린 나뭇잎과 이슬이 함께 떨어진다.
길은 평탄하다. 바닥이 제주도 특유의 현무암으로 되어있고 가끔 나무로 만든 계단과 통로가 놓여있다. 힘들지는 않지만 지루하다. 약 1시간을 걸었을까. 날씨가 또 바뀐다.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오른쪽 숲에서 거대한 소리가 다가온다. 처음에는 빗방울이다. 별안간 우박으로 바뀐다. 거의 팥알만한 우박이 쏟아져 내린다. 얼굴이 아프다. 아예 배낭을 머리에 이었다. 짙은 숲 속에서 우박이 세차게 내리는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팝콘을 튀기는 냄비 안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다. 딱 1분. 거짓말처럼 멈춘다. 길의 단조로움과 지루함에 대한 보상으로 한라산이 기이한 퍼포먼스를 마련하는 것 같다.
안개와 비와 우박의 변주 속에 약 2시간. 사라악약수에 닿았다. 누운 통나무의 홈에서 물이 쏟아진다. 늦가을 기운을 머금고 있는 약수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차다. 여기부터 정상까지는 물이 없다. 물통을 채운다. 길이 조금 솟구친다. 힘들 정도는 아니고 비로소 산에 든 것 같은 느낌이다. 안개도 걷히고 고개를 드니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이따금 비친다. 과연 백록담을 볼 수 있을까.
1시간을 더 오르면 진달래밭 대피소다. 평소에는 여기까지만 등산이 허용된다. 비바람만 피할 수 있을 정도의 대피소 건물 옆으로 매점이 있다. 커피 등 간단한 음료와 컵라면을 판다. 조금 비싸지만 산까지의 물류비용이 포함된 가격이다. 몸과 뱃속이 추운 산꾼들은 앞다퉈 뜨거운 컵라면을 두손으로 감싼다.
다시 출발, 1시간 정도 오르니 주목숲을 끝으로 나무가 없어진다. 완전히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보통 바람이 아니다. 앞서 걷던 장정들의 발걸음이 휘청거린다. 다행히 잘 정비해 놓은 나무 계단과 단단한 난간이 있다. 난간을 부여잡고 띄엄띄엄 걸음을 옮긴다. 바람에 맞은 얼굴이 얼어버린 것인지, 화끈거리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성판악 매표소를 출발한지 약 5시간. 드디어 한라산 동릉 정상 표지판이 보인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 그 뒤로는 백록담이다.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지금까지의 바람은 장난이었다. 정상의 바람은 흐르지 않는다. 망치처럼 때린다. 고무줄로 뒤를 묶어놓은 안경이 훌렁 벗겨진다. 바람을 향해 "으아∼"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뒤통수를 통해 빠져나간다. 입을 벌리니 바람이 곧바로 뱃속까지 들어올 것 같다.
백록담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에 갇혀있다. 그러나 거친 바람이 순식간에 구름을 걷어낸다. 환호성이 터진다. 그러다 구름이 또 시야를 막는다. 백록담은 몇 초 사이에 보였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구름은 더 이상 구름이 아니다. 파도처럼 달려와 백록담 연봉에 부딪혀 포말같이 흩어진다. 그것은 바람의 모습이다. 투명한 바람이 흰색 구름을 뒤집어쓰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5시간 올랐으니 적어도 50분은 머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갈퀴 같은 바람 때문에 5분도 견디기 힘들었다. 관음사 쪽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다시 몇 분 뒤에는 안개숲. 몽롱한 시야 속에서 뭔가 아쉽다. 그러나 큰 소득이 있었다. '그래, 마침내 바람의 모습을 보았어.'
/한라산=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한라산은 대나무산?
조금 엉뚱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한라산은 '대나무산'이다. 한라산 능선을 빙 돌아 온통 대나무 군락이 펼쳐진다. 큰 도로에서 차를 타고 한라산을 보면 잘 모른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굵은 대나무가 아니라 땅에 바짝 붙어 자라는 키 1m 내외의 작은 대나무다. 보통 산죽(山竹)으로 불리는 이 대나무의 정식이름은 조릿대.(사진) 제주에서 자라는 조릿대에는 특히 '제주조릿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한라산을 오르는 내내 조릿대 군락이 이어진다. 조릿대는 굴종에 잘 적응한 식물이다. 키 큰 나무들이 볕을 가려도 그 아래에서 무성하게 자란다. 그리고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낙엽이 떨어져 숲이 앙상해진 요즘, 조릿대는 녹색 양탄자처럼 숲을 덮으며 단연 돋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아름다운 회화 작품을 보는 것 같다. 잎의 주변은 노랗고, 가운데는 푸르다. 모습이 일정하지 않다. 노란 종이 위에 거친 붓으로 푸른 물감을 '쓱' 칠해놓은 것 같다. 약재로 많이 쓴다. 열을 다스리는 효과가 있고, 독을 풀며, 염증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4월에 꽃을 피우고 6월에 열매를 맺는데 열매는 식용으로도 이용된다. 그러나 꽃을 보기란 쉽지 않다. 수년, 혹은 수십년만에 딱 한번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익은 씨앗이 떨어지면 인근의 군락이 모두 말라죽고 이듬해에 다시 씨앗이 싹을 틔워 다시 군락을 이룬다.
● 한라산 어느길로 오를까
한라산 등산로는 모두 4곳. 성판악, 관음사, 어리목, 영실 코스 등이다. 사이좋게 동서남북으로 나 있다. 원래 돈내코 코스가 더 있으나 현재 자연휴식년제가 실시 중이어서 출입할 수가 없다. 백록담에 닿을 수 있는 등산로는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 어리목, 영실 코스는 8부 능선인 윗새오름 대피소까지만 오를 수 있고 백록담에 이르는 마지막 등산로는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돼 오를 수 없다.
가장 일반적인 등산코스는 성판악에서 올랐다가 되돌아오거나, 백록담에서 관음사로 내려오는 것. 아니면 그 반대의 코스이다. 성판악 코스는 평탄하지만 다소 지루하고, 관음사 코스는 백록담 기암, 탐라계곡 등 빼어난 풍광이 많다. 성판악에서 백록담까지 9.6㎞, 관음사에서 백록담까지 8.7㎞이다. 거리는 900m 정도 차이가 나지만 관음사 코스가 약간 험하기 때문에 소요시간은 모두 왕복 9시간 정도이다. 늦게 출발하면 어둠에 갇히게 되기 때문에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오전 9시 이전에 매표소를 통과해야 등산이 허용된다.
성판악 입구는 큰 길(5·16도로) 바로 옆에 있어 대중교통 수단이 흔하지만 관음사 코스 쪽으로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성판악 주차장에 차를 놓고 올라 관음사로 내려왔다면 제주시 쪽에서 택시를 불러 성판악으로 이동해야 한다. 제주시부터 미터기를 켜기 때문에 성판악까지 2만원 가까운 요금이 나온다.
백록담을 보지는 못하지만 영실-윗새오름-어리목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한라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끽할 수 있는 등산로. 약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낮 12시 이전에 매표소를 지나야 한다. 영실 쪽이 특히 아름답다. 오백나한이라 불리는 기이한 바위 능선과 병풍바위, 한라산 정상 바위 봉우리를 조망할 수 있다.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 성판악 (064)758-8164, 관음사 756-3730, 영실 747-4730, 어리목 742-3084.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