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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띄우는 편지

입력
2002.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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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를 할 때입니다. 동료 병사 중에 독특한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그림을 공부하다 입대를 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그림을 볼 줄 아는 안목은 없지만, 그 친구의 그림은 일반인도 공감할 정도로 수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부대에서 그림이 필요한 모든 일은 그의 몫이었죠. 심지어 상급부대에서 불러 몇 달간 파견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부대 안에서 가장 바쁜 병사였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기가 힘들었으니까요.

그런데 가끔 이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가지면 그가 하는 일은 가만히 창밖을 보는 것입니다. 분명 멍한 눈빛은 아닌데 미동도 하지 않고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바깥만 내다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군대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격무에 시달려서 약간 이상해진 것은 아닌지, 저러다 큰 사고를 치는 것은 아닌지…. 상관들의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의무대에도 보내고, 며칠간 특별휴가를 내 주는 등 여러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효과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유를 알았습니다. 재주만큼 열정도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병사 화가의 꿈은 ‘바람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람에 무엇이 움직이는지, 혹시 바람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지 시선을 고정시키고 바깥을 응시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람 그림을 그리려고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스케치한 것을 신경질적으로 구겨버리며 한숨을 쉬기도 하고, 밤새 끙끙거리며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이유가 알려지자 상관들은 더 걱정이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바람을 그리겠다니!’ 그러나 그의 꿈을 이해하는 몇몇 동료들에게는 신선함이었습니다. 그 열정은 제복의 문화 속에서 작은 활력소가 됐습니다.

물론 그는 아무 사고 없이 훌륭하게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습니다. 그 후 20년이 다 되도록 다시 그를 만난 적은 없습니다. 백록담에서 바람 같은 구름, 아니 구름 같은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산을 내려오면서 그 친구를 떠올렸습니다. ‘바람 그림을 완성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함께 왔으면 좋았을텐데.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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