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습을 벗어난 존재로서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존재는 거인이다. 대부분의 신화나 민담에서 거인은 단골로 등장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이 지배하기 이전에 세계는 거인들의 천지였으며 '창세기'에서도 인간들의 시대 이전에 거인의 시대를 이야기한다.중국신화에서 유명한 거인족은 과보(□父)이다. 과보라는 말 자체가 거인을 의미한다. '과(□)'는 크다는 뜻이며 '보(父)'는 이 때 아비 '부(父)'가 아니라 남자 '보(甫)'의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과보는 박보(博父)라고 부르기도 한다. '박(博)'역시 크다는 뜻이다. 과보족은 신농(神農) 계통으로부터 나왔다. 신농으로부터 땅 및 지하세계의 신인 후토(后土)가 나왔는데 과보족은 이 후토의 손자뻘쯤 된다.
그들은 엄청난 거인이다. 그 위에다가 누런 뱀을 한 마리씩 양쪽 귀에 걸고 또 양쪽 손에 쥐고 다녔다. 뱀은 고대인들에게 변화무쌍한 능력을 지닌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뱀은 거인 과보족의 신통력을 표현하는 액세서리 같은 것이다.
이 과보족은 태양과 경주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과보족 중의 한 거인이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에 떠서 하루 종일 달려서 저녁 때 저쪽 언덕까지 갈 정도이면 별로 빠른 것도 아니잖아. 한번 시합을 해볼까? 누가 빠른가."
마침내 이 거인은 태양과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그의 큰 걸음은 산과 들을 성큼성큼 건너 해를 쫓아갔다. 해가 서쪽으로 질 무렵, 그러나 그는 아직 해를 따라잡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목이 너무나 말랐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옆으로 황하(黃河)와 위수(渭水)가 도랑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는 벌컥벌컥 두 강물을 마셔버렸다.
그러나 두 강물로도 거인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모자랐다. 그는 머나먼 북쪽에 대택(大澤)이라는 큰 호수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북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그곳으로의 길은 너무나 멀었다. 마침내 그는 대택에 이르기 전에 중도에서 갈증을 못 이겨 그만 죽고 말았다.
그는 쓰러지면서 짚고 다녔던 지팡이를 땅에다 버렸다. 그러자 그 지팡이는 홀연 거대한 복숭아 나무 숲으로 변하였다. 그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혼을 지팡이에 담아 큰 숲으로 변신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는 수많은 뿌리로 원하던 물을 실컷 빨아마셨을 것이다. 신화적 존재에게 종말이란 없다. 그들은 겉으론 죽었다 해도 이처럼 몸을 바꾸어 삶의 의지를 영원히 지속한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신화학자들은 이 신화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투쟁과 정복의 의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런 의미도 있을 수 있겠으나 신화를 너무 현실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신화속에 함축된 많은 뜻을 놓칠 수 있다. 과보는 쓸데 없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굴러내려오는 바윗돌을 밀어올리는 저 시지프스와 같이 무망(無望)한 노력의 화신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과보는 황제(黃帝)와 싸우다 목이 잘리자 젖 가슴을 눈으로 삼고 배꼽을 입으로 삼아 도끼와 방패를 들고 다시 대들었던 형천(刑天)의 이미지와 많이 닮아 있다. 우리는 이 신화를 자연력이든 신이든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도전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과보족은 후일 황제와 치우의 전쟁에서 치우편에 가담한다. 같은 신농 계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군의 맹장 응룡(應龍)에게 치우가 잡혀죽자 과보족도 많이 전사한다. 과보족은 신농씨에 근원을 둔 지하세계의 신인 후토의 자손이기 때문에 후일 동이계(東夷系) 민족에 의해 저승세계를 지키는 신으로 숭배된다. 고구려 삼실총(三室塚) 고분 벽화와 경북 영주군 읍내리 고분 벽화에는 뱀을 손에 쥐고 달려가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역사(力士)의 모습이 있는데 바로 과보일 것으로 추정된다.
'산해경'에는 과보 이외에 대인(大人)이라는 거인족이 출현한다. 그들은 동방의 거친 변방에 있는 파곡산(波谷山)이라는 산 근처에서 저자를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임신한지 36년만에 출산되었는데 날 때부터 머리가 희었고 조금 자라면 구름을 타고 다닐 줄 알았으나 오히려 걸을 줄을 몰랐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용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열자'에서는 또 용백국(龍佰國)이라는 거인들의 나라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용백국은 곤륜산(崑崙山)에서 북쪽으로 9만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루는 이곳의 한 거인이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았는데 벌써 동해 바닷가에 이르게 되었다. 거인은 그곳에서 낚시질을 해서 큰 거북이를 여섯 마리나 잡았다. 거인은 그것들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등껍질을 벗겨 점을 치는 데에 사용했다. 고대에는 짐승의 뼈나 거북의 등껍질을 부젓가락으로 지져 그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습속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거북이들이 보통 거북이가 아닌 데에 있었다. 동해에는 불사의 존재인 신선들이 사는 다섯 개의 섬들이 있었는데 그 거북이들은 이 섬들을 등으로 떠받쳐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북이들이 없어지자 섬들은 표류하기 시작했고 그 중의 대여(岱輿), 원교(員嶠) 두 섬은 북극까지 흘러갔다가 마침내 대양에 침몰하고 말았다. 그래서 원래 신선이 살았던 다섯 개의 섬은 셋으로 줄어서 삼신산(三神山)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선들이 피난을 하고 천제께 진정을 하고 난리가 났다.
마침내 용백국 거인의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천제는 크게 노하여 용백국의 국토를 축소시키고 거인들의 몸도 줄여 버렸다. 그랬는데도 복희(伏羲)·신농 시대 무렵에 그들을 보았는데 키가 수십 장(丈), 즉 100m 이상이나 되었다니 그들이 얼마나 큰 거인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문헌에 기록된 또 하나의 유명한 거인은 방풍씨(防風氏)이다. 방풍씨의 나라는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리다가 물의 신인 공공(共工)과 다투게 되었다. 우 임금이 응룡 등을 시켜 자꾸 물길을 파기도 하고 막기도 하니 물의 신인 공공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공공과의 일전(一戰)이 불가피하게 되자 우 임금은 회계산(會稽山)에서 모든 신들을 소집하였다. 긴박한 상황이라 시간을 엄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다른 신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는 방풍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늦게서야 겨우 도착한 방풍씨를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우 임금은 당장 무사를 시켜 참수형을 명하였다. 전쟁 상황에서 우 임금은 일벌백계(一罰百戒)로 군기를 세워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리라.
그런데 사형을 집행하는 마당에서도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방풍씨의 키가 3장, 그러니까 9m 정도 되기 때문에 망나니의 칼이 미치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망나니가 올라가서 목을 베었다 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로부터 수천년 후 춘추(春秋) 시대에 오(吳) 나라의 왕 부차(夫差)가 월(越) 나라의 왕 구천(句踐)을 칠 때 월나라 군을 회계산에 몰아넣고 포위를 하였는데 그 때 오나라 군사가 산속에서 큰 뼈무더기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뼈 마디 하나가 수레 하나에 가득 찰 정도로 컸다. 후일 오나라 사신이 노(魯) 나라에 왔다가 공자를 만나 그 뼈의 정체에 대해 물었더니 공자는 우 임금에 의해 처형된 방풍씨의 뼈일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한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거인은 초기에 큰 세력을 지니고 등장하지만 점차 뒤에 일어난 신들과 인간들에 의해 밀려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마는 슬픈 운명의 존재이다. 중국신화에서도 거인들의 운명은 예외없이 조락(凋落)의 길을 걷는다. 그들은 천덕꾸러기이고 아둔하며, 그 때문에 패배하거나 처형되고 위축된다. 중국의 저명한 신화학자 원가(袁珂)는 그들이 대부분 신농의 후손임에 주목하여 혹시 황제계와의 갈등의 희생양은 아닌지 의혹을 표명하였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신화에서만 거인의 비극적인 면모가 보여지는 것이 아닐진대 우리는 그 이유를 좀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마 거인은 원시 인류에게 크게만 비쳐졌던 위대한 자연의 화신이 아니었을까? 거인의 조락은 점차 인문화가 진행되면서 뒷전으로 밀려나던 자연의 쓸쓸한 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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