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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앞과 뒤/대선과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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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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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한나라당 중앙당후원회는 1997년 창당 이래 최대 규모인 118억원의 후원금을 모았지만 '큰손'인 기업의 후원금은 그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억 단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였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민주당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몇몇 중소기업을 빼고는 기업에 손을 벌리지 않아 거액의 후원금은 포기한 지 오래이다. 국민통합 21의 정몽준(鄭夢準) 의원은 현대가(家) 출신이라는 점이 기업 후원금 유입의 걸림돌이다. 현대 계열사를 이끄는 형제들도 정 의원의 출마를 애써 외면하는 분위기다.대선의 계절이 돌아왔지만 대통령후보와 기업의 관계는 예전 같지가 않다.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출마 당시 기업이 수백, 수천억 원의 선거자금을 지원하고, 이보다는 적지만 야당 후보에게도 '보험료'조로 자금을 대주었던 것과 비교하면 찬바람이 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각 당 관계자들이 가장 먼저 꼽는 것은 정당에 대한 기업의 1년 후원금 한도(2억원)이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와 같은 굴지의 대기업이나 지방 중소기업에 똑같이 적용되는 한도로 1년에 두 번 열리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후원회에 쪼개서 내다보면 액수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지지 정당을 특정해 선관위를 통해 정치자금을 내는 지정기탁금제가 5년 전에 폐지된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비자금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이유다. 이보다는 대선을 바라보는 기업의 시각 및 경영 여건의 변화, 그리고 올 대선의 '특수한' 선거운동 양상 등에서 보다 근본적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의 한 측근은 "만나는 기업인마다 '비자금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한다"며 "권위주의 시절엔 비자금을 빼돌리는 작업에 수십명을 동원해도 다들 그러려니 했지만, 요즘에는 내부 고발이 활발해져 큰돈 만들기는 어렵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기본적으로 정당에 비공식적으로 줄 수 있는 돈이 5년 전, 10년 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는 얘기다. 물론 대선이 임박할수록 심해질 정치권의 손 벌리기를 피해 보려는 과장과 엄살이 일부 섞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권, 특히 유력 후보에게 반드시 줄을 대야 한다는 기업의 강박관념 내지 피해 의식이 현저하게 엷어진 것만은 틀림없다는 데는 정치권의 시각이 일치한다. 92년 14대 대선 당시 YS캠프에 참여했던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10년 전 이맘때는 기업인과의 면담이 YS와 민주계 실세의 중요 일정 중 하나였다"며 "그런데 지금은 여론조사 1위 정당이 무색할 만큼 기업인과의 접촉이 뜸하다"고 말했다.

사실 대기업은 의지만 있다면 수많은 하청 또는 협력업체에 법정 한도 내에서 후원 금을 내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자사 후원금만 달랑 내거나 관련 기업 1,2개를 끌고 오는 의례적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후문이다.

■"뭉칫돈 끌어들일 사람 극소수"

이와 관련, 민주당 노 후보는 최근 경제부처 장관 출신 의원에게 기업 자금 조달을 부탁했지만, 그 의원은 "기업이 돈을 주지 않으니 대선을 완전 공영제로 치를 수 있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는 게 낫겠다"고 건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상대적으로 기업과의 관계가 좋은 것으로 알려진 한나라당도 기업의 뭉칫돈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중진 K의원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현상은 경제 시스템이 많이 투명해져서 큰 약점이 없는 기업은 굳이 정치권에 기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기인했다는 분석이다. 민주당 사무총장을 지낸 K의원은 얼마 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기업인에게 손을 벌렸으나 그 기업인은 "내가 당신 도움을 받을 일이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또 한나라당의 재정관계자는 "97년 대선에서 현 정권과 유착한 것으로 알려진 대우의 몰락을 보면서 정치권 줄대기의 효용성에 대한 기업인의 회의가 부쩍 커졌다"고 기류를 전했다.

게다가 아직은 선거자금 수요가 크지 않아서인지 기업에 대한 정치권의 압박도 느슨한 편이다. 한나라당의 고위 당직자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지역별 군중집회를 전혀 열지 않는 데다 신문의 정강 정책 광고마저 민주당이 하지 않는 바람에 미루고 있어 자금 압박이 심하지는 않다"며 "기업을 괴롭힐 시점이 아니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의 자금담당 임원도 "과거 대선 때와는 달리 정치권의 자금 지원 요청이 없어 의외"라고 이를 뒷받침했다.

■막판 자금수요 급증 두고봐야

그러나 정치권과 기업의 이런 관계가 대선 막판까지 이어질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한다. 투표일에 임박, 후보간 우열이 분명해지는 경우와 막판 혼전이 벌어져 각 후보 진영의 자금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 모두 양측의 접근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는 관측이다.

사실 대기업이 정책적으로 특정 후보를 민다고 해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지적도 무성하다. 정당 주변에서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측에 대선 막판 기업 자금이 한꺼번에 몰릴 수도 있다"며 "YS의 대선 잔여금이 문제가 된 것도 투표를 불과 며칠 앞두고 돈이 몰려 미처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박정철기자 parkjc@hk.co.kr

■ 서울·경기·인천지부서 후원회 盧측 모금 "궁여지책"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측 선대위는 3일 노 후보가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뒤 처음으로 갖는 대규모 대선자금 모금 행사를 14일 서울·경기·인천시지부의 합동 후원회 형식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중앙당후원회 대신 시·도지부 합동 후원회를 택한 것은 중앙당후원회에서 올해 당에 넘겨줄 수 있는 한도액 400억원이 거의 소진돼 중앙당후원회를 열어도 모금한 돈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 후보측은 후원회를 연 뒤 당 선대위에 돈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후원회장이 '방해'를 하지 못하도록 서울 경기 인천시지부 후원회장을 각각 이상수(李相洙) 의원, 천정배(千正培) 의원, 이호웅(李浩雄) 의원 등 친노(親盧) 세력으로 교체했다.

노 후보 진영에 있어서 선거자금 문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노 후보측은 국고보조금이나 국가에서 보전해 주는 선거비용 이외에도 최소한 200억∼250억원을 추가로 모금해야 대선을 치를 수 있다고 보는데 지금까지 국민 모금 방식으로 확보한 자금은 15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노 후보측이 탈당 사태 현실화 등으로 어수선한 당내 분위기 속에서도 소속 의원들에게 1,000만원씩 특별 당비를 내줄 것을 요청한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노 후보측 선대위에 참여하고 있는 핵심인사들은 모두 2,000만원 이상씩 특별 당비를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노 후보측은 또 친노 인사들 가운데 나름대로 자금동원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상현(金相賢) 상임고문, 정대철(鄭大哲) 선대위원장의 활약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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