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신건(辛建) 국가정보원장을 만났을 때도 도청(盜聽)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도청은 정보수집의 가장 기초 수단일 수 있는데 정말 안할 리가 있습니까. 그럼 걸핏하면 나오는 도청 논란은 뭡니까."묵묵히 듣던 그가 불쑥 독백하듯 말을 던졌다. "만약 그 사람들이 정권을 잡게 돼 그쪽 사람이 국정원에 오는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자기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걸 문제삼았는지를 깨닫고 부끄러워 할 겁니다."
더 이상 무슨 추궁과 답변이 필요하랴. 그 한마디로 도청은 화제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며칠 뒤 국정원 도청 얘기가 또 튀어 나왔다. 기막힌 것은 이번에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이 국정원의 도청자료라고 제시한 금융감독위원장과 검찰 간부의 통화내용에는 꽤 신빙성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도청을 하지 않는 국정원의 도청자료'라는 모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 의원의 도청자료가 국정원 직원을 통해 작성된 게 맞다면 논리적으로 가능한 설명은 딱 한가지다. 국정원 내에 원장을 포함, 공식 보고라인을 배제한 별도 비선(秘線) 그룹의 존재다.
사실 이는 정황상 충분히 현실성있는 가정이다. 국정원 고위간부가 "옆 부서, 혹은 옆 직원이 하는 일을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다. '진승현(陳承鉉) 게이트'에 연루된 국정원 차장과 경제단 간부 등이 줄줄이 사법처리 됐을 때도 국정원측은 "제발 국정원이 저질렀다는 식으로 쓰지 말아달라. 조직과는 상관없다. 구조상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알 도리가 없다"고 해명했다.
유난히 소집단주의가 강하고 정치적 지향성이 유별난 국민들인 만큼 정부부처와 기관은 물론, 일반 기업이나 모임에서도 지연이나 학연 따위로 형성된 비공식 그룹의 존재는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 최고정보기관의 일이라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다르다.
국가 안보를 지상의 가치로 아는, 그래서 음지(陰地)조차 마다 않는다는 그 조직 내부 어딘가에 정치적 성향이나, 지역, 혹은 개인적 출세욕 따위가 더욱 상위가치인 곳이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사적 이해에 따른 정보기관 내 기강문제가 아니다. 이런 조직 문화 속에서 극도로 민감한 국가 차원의 정보들이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에 따라 자의적으로 다뤄지고 판단될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정보판단 착오가 중대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이미 6·29 서해교전에서 체험했지 않은가.
혹시나 있을 이런 오염된 문화로부터 국가정보기관을 격리시키는 방법은 자명하다. 국정원이 방첩 및 대북문제를 제외한 국내문제 일반에서는 과감하게 손을 떼는 것이다. 아직도 '국가 정보원'이 아닌 '기관원'이 국내 현실에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거나, 적어도 그러한 영향력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는 한 국정원은 앞으로도 이런저런 구설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준 희 사회1부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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