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경기 화성시 봉담읍 덕우리의 한 야산. 허리는 잘려 움푹 패이고 머리는 벌겋게 벗겨져 있었다. 해발 80여m의 산을 뒤덮었던 수십년 수령의 수목들은 절반 넘게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를 공장들이 빽빽이 메웠다. 그것도 모자라 황토와 돌무더기로 뒤덮인 정상에선 중장비들의 굉음과 함께 또다시 공단건설을 위한 기초공사가 한창이었다. 야산을 반으로 가른 경사진 도로 위를 덤프 트럭들이 먼지를 날리며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이곳만이 아니다. 화성 일대에서는 포크레인 등 중장비가 공장 터를 닦는 산자락과 산 절반을 헐어내 늘어선 공장 부지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현재 화성시의 공장은 2,457곳으로 부천시(2,860곳)에 이어 도내 2위. 5년 전인 1998년(1,167곳)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공장부지 면적은 도내 1위(13.37㎢)고 앞으로 지어야 할 공장이 현재 공장 숫자보다 많은 곳이다. 지금 화성은 투기 목적과 법의 허점을 노린 소규모 공장들의 난립으로 산이 깎이고 논이 메워지고 마을마저 사라지고 있다.■마을을 몰아내고 들어선 공장
"20여 가구가 살던 마을에 이제 9가구만 달랑 남았어." 제멋대로 지어진 조립식 컨테이너 소규모 공장 건물이 끝도 없이 이어진 봉담읍 덕우리의 한 마을. 주택가 도로 주변에 공장들이 꾸역꾸역 밀려들면서 마을은 갈가리 찢긴 채 뒤로 나앉았다.
공장 숲 너머 산 밑에 살고 있는 토박이 라대균(78)씨는 "원래 저 자리가 우리 집터"라며 아래쪽 공장 하나를 가리켰다. "얼마 전까지 전부 집이나 논이었지. 농사 짓기 싫다고 여기저기 파헤치고 공장 짓더니 모두 떠났어." 홀로 가을걷이를 하던 아들 종만(55)씨는 "공장이 워낙 많아 정확하게 몇 개인지도 모르겠다"며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라 못 떠나고 있지만 공장이 마을 길을 끊어 집집마다 마주보며 지내던 인심은 사라진 지 오래"라고 전했다. 다른 주민은 "예전엔 집집마다 우물이 있었는데 오염 때문에 다 메우고 다른 곳에서 지하수를 끌어 쓰고 있는 형편인데다 쓰레기 태우는 냄새며 하루종일 쿵덕 대는 기계소리 때문에 하루에도 열두번씩 떠나고 싶다"고 했다.
■쓰레기와 오수(汚水)가 가득한 논밭
"머지 않아 농사는 썩은 물로 짓고 농지는 토사와 쓰레기 더미에 묻힐 겁니다."
60여 가구가 살고 있는 팔탄면 율암2리는 추수가 한창이었다. 팔탄면 일대는 지난해 260곳이던 공장이 308개로 늘었다. 양모(40)씨는 "있는 자리 없는 자리에 공장이 들어서 마을 사람들이 '앞집은 화학공장, 뒷집은 전자회사, 옆집은 플라스틱 공장…'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라고 혀를 찼다.
공장 이야기에 옆에 있던 조명세(77)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수로(水路)를 보면 한심해. 어디서 흘러오는지도 모르고 악취만 풍기는 저 물로 농사를 지어야 하니 말이야. 그뿐인 줄 알아, 산이 사라지니까 툭하면 하천이 넘쳐요." 조씨는 지팡이로 논두렁을 툭툭 쳤다. "다 업보야, 업보. 농사 짓기 싫다고 모두 땅 팔고 떠난 게 화근이지."
근처 율암1리에 사는 김승철(40)씨도 "수질이 나빠져 먹는 물은 아예 사먹는다"며 "공장터만 아스팔트를 깔고 논이나 마을로 연결되는 비탈길은 그대로 방치해 큰 비라도 오면 쌓아놓은 폐자재 등 쓰레기 더미와 토사가 논을 덮치기도 한다"고 했다. 정남면 용수리 72 주민들도 "2년 전 마을 뒷산을 깎은 통에 장마 때마다 토사가 마을을 덮쳐 흙더미에 파묻혀 죽을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짓밟히고 깎여 죽어가는 산림
412곳의 공장이 밀집한 태안읍 기안리. 야산마다엔 어김없이 나무대신 공장 굴뚝들이 하늘을 향해 뻗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거대한 덩치의 트럭들이 위태롭게 오르내렸고, 그나마 남은 나무들도 지나가는 트럭에 팔(가지)이 부러지고 다리(뿌리)가 짓밟혔다.
공장 주변에는 쓰레기 더미와 자재 등이 널브러져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쓰레기는 어떻게 처리하냐"고 묻자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한 공장의 종업원은 "곧 폐기물 수거 차량이 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여전히 방치되고 있었다. 주민들은 "가끔 트럭이 와 쓰레기를 가져가긴 하지만 일부 찌꺼기는 땅에 묻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난개발 해법 출구가 없다
시 공업민원 관련 사무실에는 공장 허가를 기다리는 신청서가 책상 위에 수북하다. 이미 승인을 받아 앞으로 지어질 공장만도 2,785곳이나 된다. 여기에 건축법상 근린생활공간으로 지정된 500㎡ 미만의 소규모 가내수공업장인 제조장은 아예 통계에도 잡히지 않아 그 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화성에 공장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까닭은 과밀지역과 자연보전지역으로 묶인 주변 지역과 달리 공장의 신설 및 증설이 가능한 성장관리지역 인데다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등으로 교통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산업단지에 들어가면 단가도 비싸고 규제도 심하지만 개별 입주는 입지도 좋고 후에 투자 이익도 기대할 수 있다." 한 업주의 변이다.
화성시도 당장 공장 난개발을 규제할 법적 근거가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시 관계자는 "단속 사각 지대인 제조장만이라도 없애야 하지만 중앙정부가 '다 허가해주라'고 법으로 만들어 놓고선 지자체만 몰아붙이는 형국"이라고 주장했다. 얼마 전에는 시가 조례 등을 들어 주거환경권 침해를 이유로 공장 설립을 불허하자 공장주가 행정소송을 내 승소했다.
시 관계자는 "기반시설 강화 등 관련지침을 만들어 난개발을 억제하고 있지만 제조장을 일반 공장으로 개조하거나 1만㎡ 미만으로 공장을 지어 사전 환경성 검토 협의대상에서 빠져나가는 등 편법을 동원하면 속수무책"이라고 하소연했다.
/화성=고찬유기자 jutdae@hk.co.kr
● 화성시는
화성시는 지난해 3월 2읍 12면 1동을 거느린 도·농 복합 형태의 시로 승격했다. 인구는 16만4,235명이던 1994년을 기점으로 지난해 20만 명을 넘어 올해 22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꾸준히 유입되는 인구는 주로 공장 근로자들이다. 지난해 공장 근로자는 5만3,000여명에서 올해 7만2,000여명으로 늘었다.
대중국 교역을 위한 서해안 개발 전초 기지로 잘 갖춰진 도로망과 항만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주로 소규모 공장들이 난립하고 있다. 등록 공장 2,457곳 중 2,000곳 이상이 종업원 50인 미만의 소규모다. 업종은 화학이 508곳으로 가장 많고 전기·전자(377곳) 목재·제지(183) 기계·금속(169) 순이다.
아직도 화성은 농경지가 전체 면적(687.64㎢)의 39.4%를 차지할 정도로 농업이 발달해 있다. 주요 작물은 쌀 포도 딸기 등이며 낙농업은 3만4,000여 두로 전국 최대 규모(6.4%)다. 하지만 지난해 화성의 농지전용 건수는 2,544건 310만㎡로 전국 1만9,821건 2,594만㎡의 11.9%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농지 훼손이 심각한 상태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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