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46)씨 책장에는 고혈압 관련 책만 수십 권이 꽂혀 있다. 집안은 혈압에 좋다는 온갖 식품으로 가득하다.이씨를 이렇게 만든 것은 10여년 전 입사 신체검사에서 혈압이 조금 높다는 간호사의 말 한마디. 당시 그는 간호사의 말을 듣는 순간, 고혈압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며칠 고민하다가 병원을 찾은 그는 혈압계를 팔에 감는 순간, 시험지를 받아 든 수험생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160에 90. 혈압은 예상대로 높았다.
그날 이후 이씨는 고혈압 치료로 유명하다는 병원을 다 돌아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혈압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가지 이상한 것은 혈압강하제를 먹지 않았는데도 집에서 혈압을 재면 늘 정상이라는 사실이다. '불치병에 걸린 게 아닐까'라는 불안감으로 인해 이씨는 인터넷과 서점을 돌며 고혈압 정보와 책은 모조리 뒤졌다. 또 용하다는 민간요법은 다 시도해 보고 심지어 사이비 종교단체의 집회에도 참석했다.
이씨처럼 정확한 진단도 하지않은 채 자신이 중병에 걸렸다고 믿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을 '건강염려증'환자라고 부른다. 이씨 경우는 신체검사에 이상이 있으면 입사시험에서 떨어질 것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혈압이 잠시 올라갔던 것뿐, 실제 혈압은 정상이다.
하지만 그 일로 아버지 죽음을 떠올린 그는 결국 흰 가운을 입은 의사만 보면 불안해져 혈압이 오르는 '흰 가운의 고혈압 (white coat hypertension)'이라는 불안장애로 이어졌다.
이씨와 같은 건강염려증 환자가 우리나라 인구의 4%나 된다. 건강염려증은 약물·집단·인지행동 치료 등과 같은 정신과 치료로 충분히 고칠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건강염려증 환자가 정신과 치료를 거부한 채 병원쇼핑을 하거나 민간요법에 의존한다. 이제 가족이나 의사들이 나서 이들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적극 권유해야 할 때다.
/정찬호 정신과 전문의·마음누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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