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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국토기행](3)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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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국토기행](3)안산

입력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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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공단과 시화호. 경기 안산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것이다. 중소기업의 요람으로 1979년부터 가동에 들어간 반월공단은 안산에 공해도시라는 오명을 지웠고, 94년 국내 최장(12.7㎞) 시화방조제가 완공된 뒤 시화호가 겪은 지독한 수질 오염은 개발에 따른 환경 파괴의 표본으로 꼽혔다. 9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 노동자들이 안산으로 몰려들면서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도시라는 이미지를 추가했다.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안산 시내 공기는 깨끗하다. 반월공단과는 산으로 막혀있는데다 시에서 최근 2∼3년 새 오염물질 배출을 강력히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갇힌 물이었던 시화호도 97년부터 주기적으로 갑문을 열어 바닷물이 들락거리면서 수질이 많이 좋아져 갯벌 생물과 철새, 야생동물의 생태계 보고로 변모하고 있다. 안산은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다. 호주의 캔버라를 모델 삼아 자족형 도시로 설계됐다.

1976년 시흥군의 수암면과 군자면, 화성군의 반월면 일대가 반월 신공업도시로 조성되면서 오늘의 안산이 형성됐다. 그 전까지는 바다를 낀 반농반어 지대로, 드문드문 마을이 흩어져 있었을 뿐이다. 86년 시로 승격됐다. 더 거슬러 올라 고려·조선시대에는 몽골과 왜구의 침략을 막는 서해안의 군사 요충지였다. 조선 시대에는 궁중에 해산물을 진상하는 사옹원 분원의 직할 어소가 안산에 자리잡고 이곳 어민들이 잡은 생선을 임금님 수랏상에 올렸다.

옛날 안산의 풍모가 어떠했는지는 정조가 화성 행차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안산에서 하루 묵었을 때 남긴 시에서 대강 짐작된다. "소반 같은 땅 모양 일만 봉우리 연꽃과 같고/물고기라도 전당강(중국 항저우 소재)과는 비교치 말라/천하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안산이라 했는데/해마다 벼까지 잘 여물어 풍년이라네."

향토사학자인 이현우(48) 안산문화원 사무국장은 "안산은 예로부터 큰 산이나 큰 강, 큰 절이 없는 대신 큰 인물이 많이 난 곳"이라고 소개한다. 조선 초기 세조 때의 학자 겸 예술가 강희맹 강희안 형제를 비롯해 영·정조 시대 르네상스를 주도한 김 진 최홍집 등의 이른바 '안산 15 학사', 조선 후기 실학의 거두 성호 이 익 등이 그들이다. 영·정조 시대 전국에서 책이 1만 권 이상 있는 집이 전국에 다섯이었는데, 그 중 두 집이 안산에 있었다고 한다. 화가 단원 김홍도 또한 이곳 사람이다. 일제시대 여성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이 활동한 곳,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청석골도 지금의 안산시 샘골이다.

도시화를 겪은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사 짓고 고기 잡던 예전 모습은 찾기 어렵다. 특히 시화방조제 완공으로 바다가 막히면서 갯벌에서 바지락과 굴을 캐던 내수면 쪽 어업은 완전히 사라졌고 유명하던 사리 포구도 없어졌다. 지금 어촌 풍경이 남은 데는 방조제 끝 대부도의 선감, 탄도, 불도 등 먼 바다에 면한 쪽 뿐이다.

30여 년에 걸친 안산 신도시 건설과정에서 농토는 대부분 택지로 바뀌었다. 안산에서 논이 가장 많던 고잔들 너른 벌판도 2단계 신시가지 건설이 완료되는 내년이면 20층 이상 고층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완전히 변모한다. 전철 고잔역―중앙역―한양대 역을 잇는 남쪽, 서울 여의도 면적의 3배인 288만 평 고잔들을 인구 14만 명의 새 보금자리로 개발하는 공사는 92년 첫 삽을 뜬 지 10년 만인 현재 거의 마무리되어 60∼70%가 입주했다. 고잔들의 동쪽 남단 사리 포구가 있던 자리는 호수공원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다. 고잔들 개발의 효과로 IMF 경제 위기 때도 안산의 건설 경기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고잔들은 본래 바다였다. 일제 말 제방을 쌓아 갯벌을 간척하면서 지도가 바뀌었다. 안산시 와동에서 살아온 토박이 천병희(77)씨는 "고잔들 뿐 아니라 그 위쪽 지금의 안산 시청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옛날 와동은 고깃배가 들어오던 방죽마을이었고, 지금의 공단역 일대에는 둔배미라는 큰 포구가 있었어요. 시청 동쪽 성포동도 포구였지요."

안산을 동서로 관통하는 전철 안산선의 남쪽, 그러니까 안산 시의 거의 절반이 바다였다는 얘기다. 갯벌이 논으로, 다시 아파트 단지로 바뀐 것이다.

한때 안산은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꼽혔다. 10년 전인 92년 신한은행 부설 신한종합연구소의 전국 73개 시급 이상 도시 경쟁력 비교에서 안산은 시장성, 성장성, 도시 환경 정비도에서 모두 A등급을 받았다. 처음부터 도시 계획이 잘 돼 지금도 어디든 집 앞까지 차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도로가 발달해 있고 녹지율이 55%나 된다.

그러나 처음 인구 30만에 맞게 설계됐던 도시가 그 두 배인 60만 명을 돌파하면서 각종 도시 기반 시설의 부족 등 문제가 발생했다. 대중교통이 취약해 개인 택시 프리미엄이 전국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높고, 교통사고가 많아 보험회사들이 꺼리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안산 인구의 대부분은 반월공단이 생긴 뒤로 들어온 타지 출신이다. 강원도 영월·정선·태백의 폐광촌 광부들도 거의 다 안산으로 왔다. 그 뒤를 이어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왔다.

안산경찰서에 따르면 안산 지역 외국인 노동자는 시에 등록된 숫자와 자진신고 기간에 접수한 불법체류자를 합쳐 2만 8,500여 명. 파악 안 된 숫자까지 합치면 3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과 동남아 출신이 대부분인 이들은 이제 안산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반월공단의 업체들, 특히 3D 업종은 이들이 없으면 공장을 돌리지 못할 정도다. 이들을 일터로 내보내는 안산 지역 인력 파견업체만 100여 곳이 성업 중이다. 특히 IMF 이후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 값과 방세가 싼 원곡동으로 몰려 들면서 이 일대는 '국경 없는 마을'을 이루고 있다. 안산에서 제일 먼저 개발된 원곡동 일대는 90년대 초반 중앙동 쪽으로 상권이 이동하면서 주민이 빠져나가 슬럼화를 겪던 중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신도시 건설 초기나 지금이나 반월공단은 안산 경제에 절대적이다. 안산의 근로자 9만 2,000여 명 중 반월공단에서 일하는 사람이 7만 명이 넘는다. 반월공단 입주기업은 9월 30일 현재 1,884개. 주로 자동차에 관련된 조립금속 업종이 1,028개로 가장 많아 80%를 차지하고, 다음이 섬유(231개), 석유화학(211개), 기타(식품·목재·종이인쇄·1차금속) 등의 순이다.

반월공단 입주 26년 째, 콘크리트 드릴 등 건축용 파쇄 공구류를 생산하는 (주) 태양파워 박극우(51) 사장은 "높은 인건비와 값싼 중국제 공세에다 극심한 인력난 탓에 공단 내 제조업체마다 다들 이대로는 5∼10년 이상 버티기 힘들겠다며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한다.

단순 임가공이 아닌 고부가·하이테크 쪽으로의 산업구조 고도화는 반월공단의 숙제이자 안산시의 목표다. 안산시의 21세기 비전은 '녹색 첨단산업 도시'로 요약된다.

함덕호(49) 한양대 디지털경제학부 교수는 "장기적으로 안산의 미래는 녹색 첨단산업 도시 건설 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부도와 시화호를 수도권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 서울 수원 인천 안양 등 인근 도시와 30분 안에 닿는 우수한 교통시설을 활용해 안산 만의 독특한 유통시설을 만드는 등 지역 특성을 살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당초 설계보다 2배 이상 커진 실패한 계획 도시 안산. 반월공단과 함께 성장한 30년도 안된 짧은 역사는 고잔들의 2단계 신도시 건설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개발기를 벗어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안산의 역사는 이제 새로 시작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안산시 현황 2002. 9.30 현재

인구 62만 1,026 명

면적 144.773 ℓ

행정구역 2개 구(11월 1일자로 상 록구·단원구 신설) 22개 동

기업체 수 3,200여 개(근로자 9만 2,600여 명)

시화호 총면적 160ℓ(호수 50 ℓ, 간척지 110ℓ), 방조제 길이 12.7㎞

예산 6,126억원

주택 보급율 88.8%

도로 포장율 93.8%

문화유산 둔배미 놀이, 경기 배치기 소리, 잿머리 성황제, 성호 이익 선생 묘 등

관광자원 시화호 생태계, 공룡 알 화석, 대부도 등

■대부도 주민 홍기선씨

시화방조제를 건너 대부도 가는 길은 평소 안산 시내에서 30분 거리. 그러나 주말이면 서울 등지에서 몰려오는 행락객 차량으로 시화방조제를 건너는 데만 3시간이 걸린다. 94년 시화방조제가 완공된 뒤 방조제 끝 방아머리의 드넓은 갯벌에서 나던 굴과 바지락, 동죽은 사라졌다. 대신 곳곳에 포장마차와 식당, 술집, 모텔 등이 어지럽게 들어섰다.

대부도 남단, 탄도에서 나고 자란 주민 홍기선(62)씨는 "예전엔 탄도 앞바다에 고기가 지천이었는데, 이제는 고기를 잡으려면 1시간 반 이상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약간의 밭농사와 고기잡이를 겸하다 14년 전부터 횟집을 하고 있다.

"그 많던 농어 우럭이 다 어디로 갔는지. 마당 앞에서 잡아 마산포(현 화성시)에 가져다 팔곤 했는데. 요즘 탄도 어민들은 갯벌에서 조개 양식을 하거나 먼 바다에 나가 주로 꽃게를 잡지. 육지와 이어지면서 사는 건 편해졌어. 그 전에는 지하수도 없어서 이웃 선감도에 가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으니까. 한 가족처럼 지내던 인심이 박해지긴 했지만."

대부 포도로 유명한 대부도는 안산시의 막내둥이다. 96년 경기 옹진군에서 편입됐다. 평당 1만원도 안되던 대부도 땅값은 연륙화 이후 보통 40만∼50만원, 최고 350만원까지 뛰었다. 안산시는 대부도를 수도권 최대의 관광휴양 단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땅값이 더 오르지 않겠냐고 묻자 "그럼 뭐하나. 땅 임자는 대부분 외지인인데"라고 했다.

"한국전쟁 무렵 흔히 하는 말로 '대부도 가서 있는 자랑 말고, 영종도 가서 먹는 자랑 말라'고 했지. 대부도는 농토가 넓어서 예로부터 1년 농사 지으면 3년 먹는다고 했거든. 섬이지만 부자가 많아서 탄도와 불도에 26가구가 살던 70년대에 대학생이 8명이나 됐어. 영종도는 미군들이 인천상륙작전 당시 남기고 간 군용 식량이 집집마다 넘쳐서 그랬고. 대부도에서 있는 자랑 말라던 얘기도 다 옛말이야. 이제는 자랑할 게 뭐 있나. 죽기 전에 대부도가 빨리 개발돼서 장사나 잘 됐으면 하는데, 그것도 다 욕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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