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와 인근에서 22일 동안 10명을 숨지게 한 희대의 연쇄 저격 살인 사건 범인은 걸프전 참전 경력이 있는 M-16 소총 사격의 명사수였다. 경찰은 24일 새벽 워싱턴 북서쪽 프레데릭 카운티의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 청색 1990년형 셰비(시보레) 카프리스 승용차를 세워놓고 잠을 자던 존 앨런 무하마드(41)와 자메이카 국적의 양아들 존 리 말보(17)를 전격 체포했다. 경찰은 승용차에 있던 소총의 탄환 검사 결과, 워싱턴 일대 총격 살인 사건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고 밝혔다.
■범인 자신이 체포 단서 남겨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제보자는 범인 자신이었다. 범인은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17일 경찰 핫라인에 전화를 걸어 '몽고메리'의 미제 사건을 살펴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나는 신이다. 도대체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몽고메리에서 발생한 살인강도 사건을 확인해 봐라"고 말했다. 범인이 지목한 장소는 연쇄 살인 사건이 자주 일어났던 워싱턴 DC 인근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가 아니라 앨라배마 주도 몽고메리였다.
다음날 이 수수께끼는 버지니아주 애슐랜드에서 걸려온 성당 신부의 제보 전화로 풀렸다. 이 신부는 수 주 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흥분하는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다고 신고했다. 지난달 21일 몽고메리의 한 주류판매점 앞에서는 1명의 여자가 숨지고 또 다른 1명이 다친 총격 사건이 발생했었다.
경찰은 당시 주류판매점 안의 총기 관련 잡지에서 채취한 지문을 이민귀화국(INS) 기록과 대조한 결과 말보의 신원을 확인하고, 곧 말보와 무하마드의 관계까지 파악했다. 말보는 지난해 12월 그의 어머니와 함께 불법 체류로 미 서부 워싱턴주 타코마시 INS의 조사를 받아 사진과 지문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애슐랜드의 폰다로사 식당 앞 피격사건 현장에 남겨진 편지에 자메이카 방언이 들어있었던 것도 경찰이 범인을 자메이카 출신으로 추정한 단서였다. 또 범인이 1,000만 달러를 경찰에 요구하면서 송금 방법으로 제시한 신용카드가 앨라배마 사건 현장에서 분실된 것이라는 사실도 확인됐다.
또 다른 단서는 등교길 중학생이 피격된 다음날인 8일 볼티모어 부근에서 실시한 연방 보안관의 차량 검문 기록이었다. 카프리스 승용차 안에서 혼자 잠을 자던 무하마드를 검문한 보안관은 워싱턴주 운전면허증을 지닌 무하마드가 뉴저지주 차량 번호판을 단 차에 타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겨 기록에 남겨 두었던 것이다. 경찰은 그가 타코마에 살았던 것을 확인, 23일 가옥을 수색한 끝에 워싱턴 일대 연쇄 살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0.223 구경 총알을 발견했다.
경찰은 그가 타고 다닌 차량의 뉴저지주 번호판 'NDA 21Z'를 언론에 공개하고, 무하마드에 대해 불법총기 혐의로 영장을 발부받았다. 이들은 결국 24일 새벽 이 승용차를 알아 본 트럭 운전사의 신고로 붙잡혔다.
■살인 기계로 개조된 승용차
검거 당시 승용차 트렁크에서는 M-16을 개조한 부시 마스터 XM-15 소총과 망원경, 삼각 받침대 등이 발견됐다. 트렁크에는 한 명은 저격을 하고, 다른 한 명은 망을 볼 수 있도록 직경 10㎝ 가량의 두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열지 않고도 사격을 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양말로 구멍을 숨겨놓았다. 또 엎드려 쏴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뒷좌석을 젖히면 트렁크 안으로 들어가게 개조됐다.
■범인은 명사수
국방부 관계자들은 무하마드가 1990년 독일 주둔 제84 공병 부대에 배치된 뒤 걸프전에 참전했고 92년 캘리포니아의 제13 공병 대대를 거치는 등 17년 간 군생활을 하고 94년 명예 제대했다고 말했다. 그는 스나이퍼(저격수) 훈련을 받거나 특수부대에 소속된 적은 없지만 M-16 사격술 인증 시험에서 40개의 정지 표적 중 36개를 50∼300m 밖에서 명중시켜야 하는 최고 등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사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2번의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으며, 자녀 4명에 대한 접근권까지 박탈당했다.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전역한 후 손을 댄 격투기 학원과 자동차 수리점은 그에게 빚만 남겼다. 지난해 그의 둘째 전처가 자녀들을 데리고 메릴랜드주로 잠적한 이후 무하마드는 3달여 동안 이들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타코마 인근의 벨링햄에 있는 홈리스 수용시설로 들어갔다.
85년 군입대 전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지난해에는 성을 윌리엄스에서 무하마드로 바꿨다. 이웃들은 그가 인터넷을 통해 무기를 구입하는 데 관심이 높았다고 전했다.
말보는 홈리스 수용시설에서 무하마드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불법체류로 법적 보호자 마땅치 않았던 말보는 무하마드를 양아버지로 삼아 함께 살며 지난해에는 벨링햄 고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반미 성향이 범행 동기?
가장 아리송한 부분이다. 무하마드가 두 번의 이혼에 자녀 양육권마저 빼앗긴 채 혼자 살았고, 말보도 다음달 19일 추방 심리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데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건이 무하마드의 전처가 살고 있는 메릴랜드에서 주로 일어나 그가 전처를 찾아 복수하려 했을 수도 있다. 어린이에 대한 무차별 살해 위협도 자녀 양육권 박탈에 대한 보복 심리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무하마드가 9·11 테러범을 지지하는 말을 하는 등 반미 성향을 보였다는 주위 진술을 감안하면 테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범죄 심리학자들은 이들이 저격 중지 대가로 1,000만 달러를 요구했던 점을 들어 테러보다는 개인적인 동기가 범행에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무하마드가 한때 살았던 타코마시의 주택에서 지난해 1월 총소리가 들렸다는 진술로 미뤄 이들이 사전에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을 가능성도 있다. 경찰은 이 주택에서 사격연습의 타깃으로 사용된 나무 그루터기를 찾아냈다. 이 때문에 돈을 목적으로 한 범행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초기부터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추적이 쉬운 카드 송금 방식을 요구해 여기에도 의문이 남는다.
■안도하는 워싱턴 주민
워싱턴 일대 주민들은 범인이 체포되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뻐했다. 버스 정류장이나 학교 운동장, 쇼핑센터, 주유소 등에도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다시 집 밖 공터 등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각급 학교도 야외 활동이 금지되는 '코드 블루'경계를 해제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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