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실상입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반드시 죽게 되어있습니다. 다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낯선 듯 하지만 오히려 익숙한 일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예감하고, 죽음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다듬습니다.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합니다. '죽음의 의미'라고 할 법한 자기 나름의 관(觀)을 가지는 것입니다.그러한 죽음관은 개인 따라 다르기도 하고, 문화와 역사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종류의 죽음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문화나 역사의 흔적을 좇아, 또 개인의 신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죽음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죽음관은 죽음에 대한 이해나 태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어떤 것으로 이해하느냐 하는데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죽음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삶에 대해서도 진지합니다. 죽음을 경건하게 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그렇게 지니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경멸하거나 값싸게 여기는 사람은 삶을 다루는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삶에 대한 이해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죽음도 삶의 한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그런데 다양한 죽음관이 있지만 이를 다듬어보면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동일한 사실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끝과 시작이라는 정반대의 이해를 낳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 둘 중의 어느 이해가 옳은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그에 대한 인식이 경험적으로 실증되는 그러한 사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두 죽음에 대한 이해가 삶을 다르게 채색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끝이라는 이해는 죽음을 어두움, 절망, 소멸 등으로 묘사합니다. 자연히 삶은 어두움이나 절망이나 소멸을 향한 과정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시작이라는 이해는 죽음을 밝음이나 희망이나 새로운 존재에의 변화 계기라고 여기면서 삶을 그러한 것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 둘이 뒤얽혀 있는 것이 일반적인 죽음 이해입니다. 죽음은 끝이고, 끝이니까 시작이라고 하는 역설을 죽음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끝이라고 여기면서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직면한 문제를 풀려 합니다. 어두운 사례를 든다면 스스로 죽는 자살도 그러하고, 문제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타자를 살해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이해나 신념이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죽어버리든지 죽여버리고 나면 이제까지의 문제가 더 이상 없는 새로운 누리가 펼쳐지리라는 기대마저 가지고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요즘 크고 작은 테러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어떤 절박한 문제가 테러를 충동했을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죽해야 죽고 죽이는 일을 한꺼번에 해내겠습니까. 테러 방지를 위한 전쟁도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죽음은 그저 소박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비현실적인 환상이 아닙니다. 죽음의 여운이나 그림자는 상상외로 길고 짙습니다. 오히려 죽어버리거나 죽여버리는 일 때문에 문제는 더 어렵게 얽힙니다.
삶을 이렇게 가볍게, 그리고 소홀하게 마구 다룰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죽음관이 천박해진 듯 싶습니다. 아니면 아예 죽음관이 실종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생사관의 빈곤, 그것이 현대가 직면한 가장 절박한 문제인 듯 합니다.
정 진 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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