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풍 쇄신 운동을 제안한 것은 당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는 상임고문으로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 지도부에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특히 안타까웠던 것은 당시 민자당이 TK와 PK로 완전히 갈라졌다는 점이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재임 시 잘한 것도 많았고, 잘못한 것도 많았지만 나는 가장 큰 잘못이 TK, PK를 갈라서게 만든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늘 하나로 불렸던 영남이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으로 갈라지게 된 것은 문민정부 가 들어 선 이후의 일이었다.
집권 초기 박준규(朴浚圭) 국회의장은 재산공개 파동으로 의장직과 의원직에서 물러났으며 박철언(朴哲彦) 의원은 부패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군의 '하나회'숙정은 공교롭게도 대부분 대구·경북 출신이 표적이 됐다. 어찌 보면 우연일 수도 있고 개혁과 비리 척결이라는 시대 흐름에 따른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한꺼번에 같은 지역 출신 인사들이 집중적으로 제거됨으로써 대구·경북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부산·경남 출신 인사들은 중용됐으니 대구·경북으로서는 정부 여당에 등을 돌릴 만했다.
아무튼 이런 가운데 15대 총선의 해인 1996년이 밝았다. 여당으로서는 모든 것이 걸린 총선이었다. 앞서 6·27 지방선거 때 뼈아픈 패배를 겪은 여당으로서는 특히 대구·경북 지역이 문제였다. 어차피 호남과 충청은 지역대결 구도상 선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대구·경북과 수도권의 표심이 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였다.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이름까지 바꾸면서 선거에 임했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신한국당이 과반수는 커녕 10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넘쳐 흘렀다.
선거를 얼마 안 남기고 김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왔다. "지금 대구·경북의 공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 의장은 전국구를 하시고 선거 때는 대구·경북을 책임지고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김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한편으로는 고마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대구에 내려갈 때마다 현지의 반 여당 정서를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무소속이나 자민련 후보를 찍으면 찍었지 여당 후보는 어림도 없다는 게 당시 대구의 분위기였다. 당내에서도 대구 13개, 경북 19개 지역구 가운데 4,5 지역만 건져도 성공이라는 말이 공공연했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 먹었다. 신한국당이 잘못한 것도 많고, 김 대통령에 대한 반감도 심했지만 집권 여당이 임기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고 국정을 이끌어 가려면 안정적 의석을 확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새해가 밝자 각 당의 개편대회를 시작으로 곧바로 선거전이 불붙었다. 나는 지역구에 출마한 것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 각 지역을 돌며 선거를 도왔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만큼 정성을 다해 선거 지원에 나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강원 충청 대전 등 전국에서 선거 지원 요청을 받았고 틈나는 대로 달려가 지원유세를 했다.
선거전이 중반전에 접어든 이후로는 오로지 대구·경북 지역에 매달려 총력지원을 했다. 나는 가는 곳마다 대구·경북의 자존심을 강조했다. "그 동안 이 나라를 이만큼 키워 온 것이 우리 TK 아닙니까. 서로 TK를 이용하려 들지만 우리 TK의 정신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치는 정신입니다."
4월11일 총선 결과 신한국당은 예상보다 많은 139석을 얻었다. 총 299석의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서울의 47개 선거구 가운데 27곳에서 승리하는 등 선전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지원했던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왔다. 대구에서는 2석 밖에 건지지 못했지만, 경북에서는 19개 선거구 중 11개 지역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나는 전국구 의원으로 다시 등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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