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주변 상가 건물에 보증금 2,000만원, 월세 85만원, 그리고 권리금 6,000만원에 임차 계약서를 작성한 K씨. 하지만 건물주 요구로 보증금 1,000만원, 월세 40만원의 세무서 제출용 계약서를 별도로 작성해야 했다.K씨는 11월1일부터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됨에 따라 원 계약서 대로 확정일자를 신청할까 고심하다 결국 허위 계약서 대로 신청하기로 결심했다. "법이 추가로 보호해 줄 보증금 1,000만원보다 권리금 6,000만원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정확한 금액을 세무서에 신고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만약 보증금 2,000만원을 모두 신청한다면 건물주 세금 부담이 고스란히 임차인에게 떠넘겨지거나 권리금을 모두 떼일 것 아닙니까."
영세 상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허울 뿐인 법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국세청과 일선 세무서 등에는 영세 임차인의 전화 문의가 쇄도하고 있지만 실제 신청 건수는 기대치를 크게 밑돌고, 그나마도 액수를 낮춰 신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3일 국세청에 따르면 14∼22일 9일간 법 시행령 공포에 따라 각 세무서에서 임차인을 대상으로 우선변제권 확보 등을 위해 필요한 확정일자 신청을 받았지만 신청자는 10만3,000여명에 그쳤다. 이는 전국 법 보호 대상(서울지역의 경우 환산보증금 2억4,000만원 이하) 235만명의 4.3%에 불과한 수치. 국세청은 "법이 규정하고 있는 권리를 임차인 스스로 확보하는데 소극적인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K씨 사례처럼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권리금을 지키기 위해, 또 임대인의 직·간접적인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입법 예고 기간 중 임대료 부당 인상 사례가 속출하자 국세청이 세무서마다 신고센터를 설치하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실제 신고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금융기관 등에 선순위 담보가 모두 잡혀있어 확정일자 신고를 하더라도 우선변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경우도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관계자는 "법이 명분만 쫓고 관행은 무시한 탓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며 "임차인들이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별도의 방안 마련도 검토해 봐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김정곤기자 kimj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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