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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2)소설가 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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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2)소설가 박범신

입력
2002.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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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는 "나는 약하니까 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표현을 좀 바꾼다면 "나는 결핍돼 있기 때문에 쓴다." 결핍돼 있다고 느낀다면 자연히 그리움이 깊을 터이다. 발레리의 말도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먼저 '부러진 가위'가 보인다.

나의 탯줄을 끊었던 가위의 한쪽은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칠흑 같은 한밤의 일이다. 딸만 내리닫이로 낳다가 나이 마흔이 넘어 다시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어머니는 그것이 곧 당신 생애에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마지막 찬스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들은 신산했던 어머니의 삶에선 희망과 동의어였다. 아들을 낳으면 삶의 희망이 생기겠지만 이번에도 딸을 낳으면 남은 삶에 검은 휘장이 내려와 덮이게 되리라고 어머니는 생각했을 것이다.

"끽 소리도 내지 마라들."

열일곱 어린 큰누님이 산파 노릇을 해야 할 참이었다. 어머니는 출산의 통증에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큰누님을 비롯한 네 딸에게 엄포를 놓았다. 이웃집에서 아이 낳는 걸 알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태어나는 아이가 딸이면 엎어놓아 질식해 죽도록 놔둘 생각을 어머니는 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한밤에 어머니는 살의에 불타면서 어금니를 콱 물고 침묵 속에서 나를 낳았다.

졸작 '골방'에서 섬뜩한 그 탄생의 한밤을 소설화한 일이 있거니와, 그것은 매우 잔인하고 엽기적인 출산이었다. 살기 가득찬 세상 속으로 나와야 되는 나는 아마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정도의 공포감을 느꼈음직하다. 실존적 공포감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상반신을 일으켜 등잔불 밑에서 손수 나의 탯줄을 잘랐다. "그 가위가 글쎄, 한쪽이 부러져 있었지 뭐냐"라고 큰누님은 부르르 어깨를 한 차례 떨고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외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젖을 먹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의 젖부터 빨아먹곤 했다. 그러나 포만감이 든 적은 없었다. 갓난아이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견뎌내느라 나이 마흔 살 때 어머니의 젖은 이미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었다. 젖은 축 늘어져 있었고 쭈글쭈글했고 내용물이 없었다. 출산 직후에도 젖이 터무니없이 모자라 동냥젖을 먹이거나 암죽을 쑤어먹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한번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으므로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젖을 계속 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빈 젖'은 아직도 다 채워지지 않는, 나의 본능적인 결핍감과 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리고 '대님끈'이 있다.

아버지는 장돌뱅이로 사셨기 때문에 자주 집에 없었다. 그렇다고 돈을 잘 벌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방 두 칸 짜리 집안에서 성미가 제각각인 네 명의 딸들과 마흔이 넘어서 얻은 외아들인 나를 혼자 키워야 했다. 섬약했던 어머니로선 살아내는 것 자체가 언제나 힘들고 무서웠을 것이다.

"골이 쏟아지려고 한다." 어머니는 자주 말했다. 머리가 사시사철 아프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체적인 질병 때문에 오는 두통이 아니라 삶의 무게로부터 얻은 두통이었다. 삶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두통이 사라질 리 만무했다. 어머니는 자주 누나들과 다투었고 이웃들과 싸우곤 했다. 삶에 희망이 없으니 누나들도 고분고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 가족이 단란하게 둘러앉아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그런 정경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에선 매양 한숨소리, 울음소리, 악다구니 쓰는 소리가 나곤 했다. 섬약했던 나는 차마 집안에 들어갈 수 없어 동네를 배회하거나 동구 밖 저수지 가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내 최초의 세계 인식은 말하자면, 세계의 중심엔 언제나 불화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따뜻한 소통이나 화해는 일종의 신기루 같은 것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행여 당신의 '골'이 쏟아질까봐 늘 아버지의 한복 바지 대님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살았다.

왜 쓰고 있는가.

지금은 고인이 되고 만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른바 팔삭동이로 여덟 달 반 만에 태어났다.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스무 살이 넘었을 때에도 그는 유난히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했다. 그는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작가가 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왜 작가가 되고 싶으냐고 묻자, 서슴없이 "여덟 달 반 만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여덟 달 반 만에 태어났으므로 남들에 비해 한 달 반의 미숙성, 그 결핍 때문에 자신은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결핍은 결핍에서 끝나지 않는다. 결핍돼 있다고 느끼면 그것은 곧 타는 듯한 상처가 될 것이고, 그 상처를 통해 그는 결핍을 채우려 할 터이다. 그러니까 결핍은 곧 충만과 맞물려 있는 셈이다. 충만에의 그리움이 없다면 누가 읽고 쓰려 하겠는가.

내가 쓴 것들과 쓰고자 하는 것들은 나의 현재적 삶과 '부러진 가위'와 '빈 젖', '대님끈' 사이에 다 들어 있다. 이를테면 실존적인 공포감과 본능적인 허기와 사회적 결핍이다. 나는 그것들 때문에 그것들을 이기려고 쓴다. 최종적으로 내가 도달하고 싶은 세계엔 '부러진 가위'도 없고 '빈 젖'도 없고 '대님끈'도 없다. 탄생의 공포감은 탄생에 깃든 원형적 죽음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을 터, '부러진 가위'가 없는 세상이란 곧 불멸의 세상이다. 또 '빈 젖'이 없는 세상이란 허기가 없을진대, 욕망 때문에 쫓겨 달려가는 삶을 살 필요가 없을 것이고, '대님끈'이 없다면 사람과 사람이 모두 아름답고 원만하게 소통하는 세계이니 단독자의 죽음 같은 고독이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고독하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불멸의 세계에 대한 잔인한 그리움이 내가 느끼는 결핍감 속에 운명적으로 깃들여 있다. 그 모든 그리움을 다 채울 길 없으니 쓰지 않고 어떻게 내 목숨 견디겠는가. 그렇지만 이런 논리는 범박하고 상투적인 자기변명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럼 차라리 교회나 절로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뻔한 원론적 명분 뒤에 혹시 비겁하게 숨기고자 하는 다른 자기가 있는 것은 아닌가.

대체 왜 쓰는가.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것 말고 다른 것에선 만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쓴다"고 말했다. 역시 동감이다. 쓰는 것과 비교해보면 다른 모든 일이 전부 쓰는 일보다 심심하거나 빨리 지루해지거나 한다. 쓰는 일에서 다른 무엇보다 최고의 만족을 얻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소한 삼십여 년을 해왔어도 아직껏 일상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아내와 결혼하고 반 년도 지나지 않아 권태기가 왔던 일과 비교해봐도 그렇다. 사랑조차 일상화가 가져오는 부식성을 견뎌내지 못하고 재빨리 습관화해버리는 현대인의 삶에서. 삼십 년 넘게 계속 일상화되지 않는 그 어떤 일이 있다는 건 참으로 축복이자 저주이다. 마치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이상하고 이상한 병에 걸린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도무지 일상화되지 않으니 이승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일상화될 때까지 쓰는 일을 멈추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 세상까지 이 짓을 연장해서 하고 싶진 않다. 쓴다는 것이 주는 놀라운 비일상화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쓰는 행위는 어쨌든 불확실한 어둠 속을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유명 가수가 되어 '게릴라 콘서트'에 한번 출연하고 싶다. "자, 안대를…풀어주세요." 사회자의 주문에 따라 안대를 풀고, 점점 넓어지는 조명의 라인을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드러나고, 마침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소리. 쓰는 일은 때로 지긋지긋하다. 어느땐 지긋지긋하기 때문에 이 노릇을 계속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팔자소관이 아닐 수 없다.

● 연보

1946년 충남 논산 출생

1971년 원광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 당선 등단

1992년∼현재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겨울강 하늬바람' '불꽃놀이' '불의 나라' '물의 나라''외등'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덫'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연작소설 '흉기' '흰소가 끄는 수레' 등

대한민국문학상(1987) 원광문학상(1998) 김동리문학상(2001)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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