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 예상은 맞았다. 김선아(28)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시트콤에서, 피자 CF에서 보여준 코믹한 이미지가 결코 연기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주문한 스파게티에 홍합이 들어있자 대뜸 "어, 나 오늘부터 홍합은 안 먹기로 했는데. 아예 조개도 먹지 말까"라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영화 '몽정기'를 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왜 그 말을 하고, 그 말이 또 얼마나 솔직하고 우스운 건지 안다.꾸미거나 '척'하지 않는다. 목소리, 말투도 선머슴 같다. 원래 그렇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학원 가는 것보다 밖에서 사내 아이들과 제기차기하는 것이 좋았다. "초등학교 친구들이 '네 성격은 초등학교에서 멈췄다'고 말해요. 굳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살면 돼요."
출발은 정반대였다. 96년 우연히 화장품 CF모델로 발탁됐다. 청순하고 새침한 이미지. 첫 미니시리즈 '세상 끝까지'를 할 때도 그 이미지는 계속됐다. 화근은 그 놈의 시트콤 '점프'였다. "제 성격이 '뽀록'난 셈이죠. 아무도 캐릭터의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피자 CF도 그래서 하게 됐고, 그 이미지가 너무 자연스럽고 깊은가 봐요." 오죽하면 '몽정기'의 코믹한 인물 유리를 보고 모두들 "선아, 이제 제자리에 왔구먼"이라고 할까.
교생으로 첫사랑 선생님을 쫓아다니는 푼수. 처음에는 "이 여자(유리) 참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고 깨끗하고 바보 같은 여자이기 때문.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이 남에게는 '척'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여자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연구요? 나, 연구하는 체질 아니에요. 특별히 계산하거나 연습하지 않았어요. 거울보고 연기 연습하는 거 웃기잖아요. 현장에서 상대역인 공병철(이범수)을 만났을 때의 느낌대로 연기했어요. 정초신 감독의 말대로 어쩌면 내 안에 그런 면이 숨어 있었을 수도 있어요."
김선아는 영화를 늦게 시작했다. 그것도 그동안 이미지와 정반대인 역할로. 6월에 개봉한 데뷔작 '예스터데이'는 영화 전체 분위기도 우울하지만, 그녀가 맡은 메이란 여경찰도 무거웠다. "너무 해보고 싶은 장르였어요. 후회 없어요." CF 때문에 너무 한쪽 이미지로만 나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과감히 CF까지 포기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CF로 가야지, 그 반대는 폭이 너무 좁아요."
'예스터데이' 가 너무 어두워 밝은 것을 해보고 싶었다. "남들이야 어떻게 보든 깨끗하고 순수한 로맨스 라인이 예쁘잖아요. 교생도 해보고 싶었고, 어릴 때 남자학교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시나리오를 읽고 걱정도 했다. 잘못하면 천박한 코미디가 될 수 있구나. 이범수와 감독을 믿고 찍으면서 그 걱정은 사라졌다. "이 영화를 어른들도 보고 '열린 마음'으로 아이들의 미친듯한 성 충동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사고가 없죠."
김선아는 영화배우로 자리잡고 싶어한다. 무엇보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코미디를 더 잘할 수 있지만 파고들만한 캐릭터라면 기꺼이 도전할 각오다. 대충대충이나 급한 것을 싫어해 온 힘을 쏟아 한 작품 하고 나면 늘 한동안 아파서 끙끙 댄다. "알고 보면 꼼꼼하고, 까다롭고, 예민하고 부끄러움도 많아요. 그런데 아무도 안 믿어줘요." 그리고 보니 김선아에 대한 또 하나의 예상은 틀렸다. 겉은 선머슴이지만 속은 정말 여자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 몽정기
너무 노골적이고 유치해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웃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성기와 섹스를 의미하는 단어의 남발, 직설적인 대사, '아메리칸 파이' 를 연상시키는 갖가지 역겨운 행동의 반복, 지나치게 희화화한 캐릭터들. 아무리 성에 대한 호기심과 무지와 충동이 뒤섞인 막 사춘기를 시작하는 중학교 2학년 사내 아이들라고는 하지만 거북하다. 그렇다고 심리묘사가 섬세한 것도 아니고.
소품은 또 얼마나 엉성한가. 배칠수가 라디오 DJ로 나오는 것은 웃기려는 의도라고 쳐도 80년대라면서 버스정류장이나 택시, 아이들의 응원 모습은 분명 요즘 것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다. '몽정기'는 이제 막 남자가 되기 시작한 청소년들의 몸에 관한 영화다. 동현(노형욱), 석구(전재형) 상민(정대훈) 영재(안재홍) 4총사의 관심은 오직 자위행위 몽정 섹스 뿐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교생 유리(김선아)를 상대로 온갖 상상과 내기를 한다.
이 뿐이었다면 정말 솔직함을 핑계로 사춘기 아이들의 호기심과 충동만 자극하는 발칙하고 너절한 영화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들을 정화하는 어른들의 첫사랑, 짝사랑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있었다. 첫사랑인 여고시절 은사이자 4총사의 담임인 공병철(이범수)을 잊지 못해 찾아왔지만, 어쩌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유리.
명랑만화의 주인공 같이 코믹하고 엉뚱하지만, 숙맥 같은 그녀의 소중한 마음이 4총사의 성적 호기심과 충동을 폭발이 아닌 아름다운 성장으로 승화시켜준다. 석구가 어른이 돼 교생(가수 싸이)이 된 후 되바라진 여고생들에게 곤욕을 치르고는 옛날 버릇 그대로 행동하는 장면에서 주저 없이 폭소를 터뜨릴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싸구려 같아서 선뜻 내키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쾌하고, 처음 엉성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성도 탄탄하고 착지(着地)도 깔끔한 코미디. 프로듀서와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출신으로 '자카르타'로 데뷔한 정초신 감독만이 가진 묘한 매력이다. 대입수학능력시험(11월 7일)이 끝나는 때를 겨냥해 11월 6일 개봉한다. 15세관람가.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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