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에서 물러난 지 열흘 후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나를 찾았다. 7월8일 아침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김 대통령은 나를 위로했다. "이 의장,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오." 스스로 어느 정도 마음을 달랬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김 대통령을 만나니 섭섭한 감정이 되살아 났다.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난번에 날치기 사회를 거부했다고 바꾼 것입니까?" 김 대통령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부인했다. "그게 아닙니다." 나는 계속해서 "그럼 민주계가 아니어서 바꿨습니까?" 하고 물었다. 김 대통령은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김 대통령은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 했다. "아이구,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이 의장은 또 일할 기회가 있을테니…. 어서 식사나 합시다." 그래도 나는 할말은 다 했다. 집권 초기의 높은 지지율만 믿고 모든 일을 무리하게 결정하는 경향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민주계니, 민정계니 하는 말이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계보를 따지는 정치는 그만 둬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도 오랜 경험으로 잘 아시겠지만 이제 국회도 무리하게 밀어 붙여서는 안 될 일입니다. "
국회의장에서 물러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94년 8월2일, 전국 세 곳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민자당은 1승2패를 했다. 나는 국회의장 경질이 대구 수성갑과 경북 경주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당시 두 지역의 야당 후보는 "YS 정권이 날치기를 거부한 이만섭 의장을 바꿈으로써 이제 하나 남은 국회의장직까지 TK로부터 빼앗아 갔다"고 지역 주민들을 자극했다.
민자당의 보선 패배로 정국은 불안해졌고, 특히 TK 지역은 위기감이 감돌았다. 당 소속 의원들 사이에는 보선 패배에 대한 지도부 인책론이 제기됐고, 대구 경북 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여당 간판 무용론'과 '신당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지방 선거와 1년 반밖에 남지 않은 15대 총선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TK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반(反) 민자당 정서의 확산도 문제였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정부 여당이 정국 운영에 난맥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8월20일 나는 당의 상임고문으로 위촉됐다. 자리를 맡아서가 아니라 당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 여당이 바른 길을 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8·2 보선 결과에 대해서는 "달라진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일 자세가 돼야 한다"며 "말만 있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민자당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당은 진정한 위기 의식을 갖지 못했다. 보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은 여전히 민주계가 좌지우지했다. 시도지부장이나 당무위원 개편에서도 민주계가 중심을 차지했다. 나는 "민주계가 전면에 포진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데 국내외적으로 현안이 산적한 지금 어느 한 계파만을 중심으로 국정 운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부 여당의 정책 혼선은 점점 잦아졌다. 특히 당시 나라 안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 정부는 부처간의 혼선을 수시로 드러냈다. 한승주(韓昇洲) 외무장관이 "특별 핵사찰이라는 용어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발언한 데 대해 정종욱(鄭鍾旭) 청와대외교안보수석이 과민하게 반발하는 등 관련 부처간 대립도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나는 이처럼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대북·북한 핵 정책에 대해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호되게 질타했다. "지금은 해방 이후 남북관계가 제일 어려울 때인데 도대체 현 외교안보팀은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인지 걱정이 태산같다." 민자당 고문단회의에서도 나는 "남북문제나 북한 핵문제를 둘러 싼 당정 협조의 미비와 이로 인한 정책의 일관성 결여로 국민의 믿음을 잃게 됐다"며 정부를 나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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