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개발 문제에 대한 미국의 표면적인 접근법은 외교적 노력을 통한 평화적 해결이다. 미국의 정부 관리들은 북한의 핵 개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미국의 목표이지만 그 과정은 동맹국과의 협의와 주변국의 협조 아래 이뤄질 것이라는 점을 되풀이 강조하고 있다.21일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과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대 북한 중유공급 및 경수로 지원 건설 중단 여부에 대한 질문 공세에 즉답을 회피한 채 이해 당사국 간 협의의 중요성을 누누이 설명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아예 "지금은 미국과 미국의 친구들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무장해제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킬 기회"라고 못박았다.
이 같은 발언을 종합하면 1994년 제네바 핵 합의 파기 여부에 대한 미국의 결정은 적어도 다자간 협의 과정을 거쳐 명확한 결론을 얻은 이후로 미뤄지고 있다는 관측을 낳는다.
하지만 수면 하에서 감지되는 기류는 이와는 정반대다. 오히려 평화적 해결과 다자간 협의의 강조는 이미 내려진 결론을 효과적으로 이뤄내기 위한 외교적 수사에 가깝다는 느낌마저 풍긴다.
워싱턴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중 상당수는 미국 정부가 이미 내부적으로는 "제네바 핵 합의는 죽었다(dead)"라고 선언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핵 합의 파기를 선언했을 때 이미 미국 정부의 판단은 끝났다"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미 정부 내에는 강경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특히 부시 대통령 출범이후 대북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백악관 팀은 미국이 제네바 핵 합의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된 상황을 '즐기는' 듯한 분위기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고위 관계자는 이날 미중 정상회담 브리핑 도중 "북한의 합의 파기로 제네바합의가 무효화한 이상 우리가 의무를 수행할 필요는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브리핑 후에는 "의회로부터 대북 중유 공급을 위한 예산을 승인받는 일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며 "북한에 대한 중유 공급은 사실상 끝났다"고까지 말했다.
이 관계자의 언급은 미 정부 내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발언 속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초강수의 압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백악관 내의 이런 기류는 미국의 정책이 한국, 일본 등 동맹국의 입장을 수용하기보다는 미국의 주장을 강요하는 쪽으로 흐를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워싱턴에서는 일시적인 미국의 중유공급 중단이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건설 공사 중단은 북한의 태도에 결정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는 한 실행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상 문제일 뿐이라는 견해가 세를 불리고 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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