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사람들은 또 한번 귀가 트이는 노래를 들었다.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뜸했었지' 였다. 제목부터 튀었던 이 노래는 이제까지의 가요와는 달랐다. 멜로디는 그리 낯설지 않았지만 비트가 강한 리듬은 평범한 손장단으로는 따라 맞추기 힘들 정도였다. 붕어들이 껌벅거리는 듯한 악기 소리에 간주도 전에 없이 길었다. 하지만 묘한 자극은 몸을 들썩이게 했다.사랑과 평화의 음악은 펑키(Funky)였다. 70년대 초반 미국에서 유행했고 소울에서 가지를 쳐 디스코는 물론 힙합에까지 영향을 미친 흑인 음악의 한 장르다. 낯선 흑인 음악인 펑키 리듬으로 만든 '한동안 뜸했었지'가 준 충격은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미인'에 버금갔다.
사랑과 평화는 여러모로 신중현과 닮았다. 전신인 서울나그네는 70년대 중반 이남이(54·베이스) 이철호(50·보컬) 최이철(49·기타) 김명곤(키보드·2001년 사망) 김태흥(드럼·83년 사망)이 모인 미 8군 밴드 하드락스의 또 다른 이름. 이들은 오디션과 일종의 승급시험으로 밴드의 실력을 평가했던 8군 무대에서 한국 밴드로는 유일하게 스페셜 A를 받은 실력파 연주자들이었다.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주자"는 이남이의 제의로 이름을 바꿨다.
음반을 낸 건 전적으로 이장희 덕분이었다. 동양방송 DJ 출신으로 대마초에 걸려 활동이 묶인 이장희는 이들을 눈 여겨 보고 작사, 작곡한 '한동안 뜸했었지'를 주며 음반을 내자고 했다. 기타리스트 최이철은 "(이)장희 형이 건네 준 원곡은 전형적인 느린 통기타 곡이었다. 우린 그걸 펑키로 완전히 바꿔 불렀다"고 말한다.
신중현이 한국적 멜로디를 고민한 반면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한국적 리듬이었다. 최이철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김명곤과 함께 한국의 장단과 비슷한 펑키를 어떻게 표현할까 자주 토론했다"고 회상한다. 가사에 대한 제약이 남달랐던 시절 주류 음악의 틀을 거부한 이들의 펑키 리듬은 또 다른 자유였다. 연주에 대한 고민은 최이철이 주도했다. 외국에 나갔다 오는 사람에게 부탁해 어렵게 마련한 첨단 악기들과 공동체 생활로 다진 연습은 반주에 불과했던 한국 록밴드의 연주를 비로소 연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연주곡 '베에토벤의 운명' 을 최초로 음반에 실은 것도 그러한 고민의 결과다.
하지만 사랑과 평화에게도 역시 대마초가 문제였다. 음반 발매 직전 이철호와 이남이가 대마초로 구속되는 바람에 갑자기 멤버가 바뀐 데 이어 1979년 2집에서 '장미'와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가 히트한 이듬해 멤버 전원이 대마초로 구속되면서 불과 2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다. 사랑과 평화를 마지막으로 클럽을 근거지로 한 밴드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펑키는 더더욱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랑과 평화는 88년 다시 모여 이남이가 부른 '울고싶어라'로 재기했다. 초기부터 멤버 교체를 거듭하면서도 지금까지 활동하는 한국 최장수 밴드다. 원년 보컬 이철호가 이끄는 사랑과 평화는 춘천에서 철가방 프로젝트라는 밴드로 활동 중인 이남이, 밴드 유라시아의 아침을 이끌며 솔로 음반을 준비중인 최이철 등과 내년초 '사랑과 평화-히스토리 & 뉴'를 발매하고 '한국 펑키의 원조'로 살아있는 전설을 들려줄 예정이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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