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타임스 보도에 이어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이 북미 제네바 핵합의의 사문화를 언급하면서 1994년 이래 한반도 문제 해결의 기본틀로 작용해 온 핵 합의 문서는 미국에 의해 사실상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있다.엄밀하게 말해 파월 장관의 언급을 미국 정부가 핵합의 파기를 공식화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협정의 한쪽 당사자가 일방적으로 파기를 선언한 이상 다른 쪽도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다는 원론적 입장 표명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발언에는 북한이 핵 개발 계획을 시인한 순간 국제적 약속을 갖는 문서로서의 효력은 이미 없어졌다는 판단이 담겨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파기의 선언 유무는 형식적인 절차일 따름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향후 핵 합의를 둘러싼 논의의 중심은 과연 미국이 이같은 결정을 실행에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옮아갈 것이다. 미국의 파기 결정은 곧 북한 핵 동결의 대가로 약속했던 '의무'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미국은 당장이라도 경수로 2기 건설 때까지 북한에 제공키로 한 연간 50만 톤의 중유에 대한 공급중단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한국, 일본 등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당사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경수로 건설 공사를 중단토록 하는 것도 미국이 뺄 수 있는 카드다.
현재까지 미국은 이런 선택을 유보하고 있다. 파월 장관은 "중유공급 중단 등 결정은 동맹국과의 협의 아래 신중하고 현명한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며 "미국은 즉각적이고 경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도 19일 CNN 방송에 출연 "북미 핵합의에는 관련된 다른 당사국들이 있다"며 "우리는 이들 관련 당사국들과의 협의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신중한 행보가 제네바 핵합의 체제의 용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지 W 부시 정부는 북미 핵 합의를 빌 클린턴 정부가 남긴 실패한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부시 정부 관리들에게 북한의 핵 개발 시인은 자신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시 정부는 중유공급과 경수로제공 카드를 활용, 북한과 새로운 조건의 계약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클린턴의 문서가 아닌 부시의 문서를 만드는 것이다. 그 전제조건은 물론 북한의 핵 개발 계획 포기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뿐 아니라 국제 사회를 통한 압력 수단을 총동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8년 전 북한의 응석에 끌려가 사탕만 주는 결과를 낳았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확실하게 협상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생각이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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