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73)14대 국회의장 시절 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73)14대 국회의장 시절 ⑤

입력
2002.10.21 00:00
0 0

1994년 4월22일에는 이회창(李會昌) 국무총리가 전격 사임한 사건이 있었다. 이 총리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가 내각의 논의 없이 정책을 결정한 데 반발, 사표를 제출했고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이를 전격 수리했다. 후임에 이영덕(李榮德) 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이 내정됐는데 문제는 국회 인준이었다.야당은 이 총리의 경질을 두고 "헌법에 명시된 총리의 권한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요구와 헌법을 지키지 않으려는 현 정권의 충돌"이라며 공세에 나섰다. 또 증인 채택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상무대(尙武臺) 관련 국정조사와 총리 임명동의안을 연계할 태세였다. 인준안 통과는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총리가 공석이 된 지 1주일이 지난 28일은 임시국회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총리 임명동의안을 처리하지 못하면 국회를 다시 소집해야 하기 때문에 총리 공백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28일 밤 11시50분 임시국회 폐회를 10여분 남겨 놓은 시점에서 나는 회기 1일 연장을 선포했다. 이날 본회의에는 총리 임명동의안이 의안으로 올라 있긴 했지만 야당의 의사진행 방해로 처리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회기 연장 선언은 새로 임시국회를 소집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여야는 순간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야당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임명동의안과 국정조사 증인 문제를 연계해 협상할 시간을 벌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야당 총무단은 의장실에 몰려 왔다. 그러나 내가 본회의 사회를 보러 나가는데도 몸으로 막지는 않았다. 말로만 "의장님, 들어가지 마시지요"라고 만류할 뿐이었다. 본회의장 의장석에 올라가 보니 야당쪽 의석이 텅 비어있었다. 나는 임명동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앞서 국민을 향해 이렇게 밝혔다. "송구스럽지만 더 이상 국정 공백을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나라를 위해 부득이 여당만이라도 총리 인준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이해를 바랍니다." 다음날 각 신문은 '결국 반쪽'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어느 정도 명분이 있었기에 일방적으로 나와 여당을 비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시간은 흘러 박준규(朴浚圭) 전 의장의 잔여 임기 1년 2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나는 자리에 연연하진 않았지만 청와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국회의장 상을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서 내심 연임을 원했다. 그러던 중 6월25일 박관용(朴寬用)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화를 했다. "지금 공관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신문은 유임이냐, 아니냐로 설왕설래했지만 나는 유임을 믿고 있었다. 마침 신라호텔에서 행사가 있어 그 곳에서 박 실장을 만났다. "의장님, 죄송합니다. 이번에 국회의장이 바뀌게 됐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요? 대통령께서 날 보고 그대로 하라고 하셨는데…" 박 실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께서 의장님과 하신 말씀도 있고 해서 직접 전화하기가 어렵다고 저를 보냈습니다."

박 실장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전날인 24일 방한 중이던 태국 총리를 위한 청와대 만찬에서 김 대통령이 내게 분명한 언질을 줬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툭 터놓고 김 대통령에게 물어 보았다. "후반기 국회도 계속 맡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선뜻 "아,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속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내가 민주계가 아니어서 바꾼다는 말이오?" "아니, 그게 아닐 겁니다." 박 실장은 부인했지만 나는 민주계 인사들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생각했다. 민주계 인사들이 "집권 후반기에 의장이 말을 안 들으면 곤란하니 바꿔야 한다"며 나를 견제했다는 얘기를 나도 듣고 있었다.

박 실장과 헤어진 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공관으로 돌아왔다. 국회의장이 청와대의 낙점을 받는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했고, 날치기를 거부한 것이 적잖게 작용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기도 했다. 다음날 나는 중립적 국회 운영에 공감을 표했던 여야 의원들에게 감사 전화를 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