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新 국토기행](2)당진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新 국토기행](2)당진

입력
2002.10.21 00:00
0 0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손만 넣으면 조개와 소라가 무더기로 잡히던 갯벌은 드넓은 간척지로 바뀌었고, 풍어 소리 요란하던 조그만 포구 옆에는 거대한 LPG 운반선이 정박해 있었다. 고려 때부터 중부지방 최대의 곡창지대로 이름을 날린 황금들판에는 어느 샌가 송전탑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60)이 '택리지'에서 "지형이 평탄하고 예쁘며 서울에서 가까워 사대부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칭송했던 충남 당진이다.

서해대교를 지나 도착한 당진군 송악면 한진(漢津) 포구. 해마다 가을이면 농어와 새우, 숭어가 가득 잡혀 강화에서 목포, 심지어 영남지방에서 몰려든 어선으로 불야성을 이루던 곳이다. 국내에서 중국 나라 이름이 들어간 곳은 이 한진과 당진(唐津) 뿐. 그만큼 예부터 중국과의 해상무역이 활발했다. 또한 민물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으면 '합덕(당진군 합덕면) 방죽에 줄남생(낚시꾼) 늘어 앉듯'이라는 속담까지 생겼을까.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뀌었다. 포구 왼편과 뒤편에는 동부제강 연합철강 하이닉스반도체 LG에너지 등 거대한 공장이 들어선 고대·부곡 국가산업단지, 오른편 행담도 위에는 2000년 12월 완공된 서해대교가 개발의 상징처럼 위풍 당당하게 서 있다. 선착장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소라와 꽃게 좌판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꽃게 1㎏에 2만원밖에 안 해요. 알이 가득 배어 있다구요."

한진에서 20여㎞ 떨어진 석문면 교로리의 변화는 더욱 격심하다. 1985년 대호방조제가 들어서면서 어장과 포구까지 잃었다. 4대째 김 양식과 유자망 어업을 해오다 최근 농업으로 전환한 한 주민(60)의 말이다. "81년 대호만 물막이 공사가 시작되면서 어장을 잃었죠. 그래서 94년부터 가구당 2,500평씩 분양 받은 간척지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올해는 태풍으로 생산량이 평년의 60%밖에 안 돼요. 조만간 농업기반공사에 분할상환금을 조금 깎아달라고 할 작정이에요."

이러한 변화상은 농촌도 마찬가지다. 당진은 원래 충남 제일의 곡창지대이자 아름다운 들판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당진읍과 고대면, 정미면에 걸친 평야 이름이 채운들(彩雲坪)인 연유다. 향토사학자 홍석표(65) 내포향토문화원장은 "고려 때부터 당진은 인근 공주 홍주 평택 안성 등 41개 군현에서 조곡이 모여든 중부 최대의 곡창지대"라며 "우강면과 합덕읍 일대의 소들평야(牛坪)와 채운들, 그리고 충남 제2의 젖줄인 삽교천은 당진을 일찍부터 천혜의 농터로 자리매김케 했다"고 말했다.

아직도 당진쌀은 맛좋기로 유명하고 전국 248개 기초자치단체 중 세 번째로 넓은 경지면적(3만5,000여㏊)을 자랑하지만 들녘 풍경만은 바뀌었다. 교로리 당진화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 200만㎾가 200여m 간격으로 들판을 가로지른 거대한 송전탑에 실려 타지로 뻗어간다. 지금도 5·6호기가 건설 중이고 7·8호기 건설부지도 이미 마련됐다.

당진에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이 급격히 밀려들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부터. 90년 12월 한보철강 제철소가 송악면 고대리 일대 119만 평 부지 위에, 95년 5월에는 화력발전소가 석문면 교로리 112만 평 부지 위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92년 완공된 동양최대의 석문방조제(길이 10.6㎞)는 3,700여㏊의 간척지와 담수호, 국가공단 부지를 만들어냈다. 99년 송악면 고대리와 부곡리 일대에 조성된 고대·부곡 국가산업단지는 무려 161만 평이다. 이 과정에서 토지 수용과 어업권 상실에 따른 갈등과 혼란은 홍역처럼 치러야 했다. 화력발전소 건설로 인해 대대로 앞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오던 교로리 주민들은 평당 7만∼8만원씩 보상을 받고 농사와 공장 취직 등 전업에 나섰고, 89년 현대정유 공장이 들어선 석문면 난지도의 유명한 굴과 해태 양식장은 모두 썩어버렸다.

물론 산업화와 도시화에는 이 같은 그늘만 있는 게 아니다. 당진 사람들은 개발에 따른 분명한 이득과 시대의 변화를 헤쳐나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전재욱(49) 교로리 이장은 "발전소 건설 당시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던 게 사실이지만 산업화에 따른 어느 정도의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과거 하늘만 바라봤던 천수답이 지금처럼 대규모 관개농으로 탈바꿈한 것은 방조제 건설과 간척지 개발의 덕분"이라고 말했다.

당진읍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이혜경(42·여)씨도 "97년 1월 한보가 부도나기 전만 해도 당진읍의 거의 모든 가게는 퇴근한 한보철강 직원들로 밤11시까지 문을 닫지 못했다"며 "개발의 그늘만을 강조하는 것은 한때 스쳐가는 관광객의 어설픈 감상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개발에 따른 몸살을 앓은 당진이지만 요즘은 새 희망에 부풀어 있다. 한보철강이 살아나기 시작하고 지난해 12월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21세기 서해안 거점도시'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갖게 됐다. 순수어촌에서 갯벌체험이나 낚시배 대여 등 관광어촌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와 변화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당진군청의 한 공무원은 "2006년 대전―당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충남의 시베리아'는 '서해안의 희망봉'으로 바뀔 것"이라고 장담했다.

변화상이 두드러진 곳은 한보철강 제철소. 부도 후 5년간 법정관리 상태이지만 공장은 의외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철근을 만드는 봉강공장 내 전기로는 쉴 새 없이 쇳물을 쏟아내고, 벌겋게 달아오른 철근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레일을 달리고 있었다. 아직 4개 공장 중 1개만 가동할 뿐이지만 올해 상반기 경상수지는 지난해 같은 기간 1,458억원 적자에서 675억원 흑자로 돌아섰다. 조만간 인수업체가 결정되고 공장 가동이 정상화하면 당진 전체가 들썩거릴 게 분명하다.

김낙성 당진군수는 당진의 미래를 '서해안 거점도시'와 '대(對)중국 물류전진기지'로 요약했다. 김 군수는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으로 당진은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배후도시로 커나갈 수 있는 발판을 갖게 됐다"며 "특히 중국에서 불과 300㎞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당진항은 국제적인 허브항구로 성장할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당진은 산업화에 따른 명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고용창출과 생존권 박탈, 도시 개발과 자연 파괴…. 어쩌면 개발을 앞둔 우리나라의 모든 국토가 함께 고민해야 할 이 문제에 대해 정주석 신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몇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당진이 너무 급속하게 개발되다 보니 환경 파괴와 주민 생존권 박탈 등 부작용이 없지 않았다. 결국 개발과 보존의 문제다. 예컨대 바다바람이 많이 부는 당진에서는 대호·석문방조제 위에 대형 바람개비를 달아 풍력발전을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환경오염도 최소화할 것이고 훌륭한 관광자원도 될 것이다. 지상에 올라 있는 송전시설을 땅에 묻는 것도 한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한 개발로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석문면 교로리의 자연마을 왜목마을은 수 억년 전부터 서해에서 유일하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요즘 당진의 해는 서해대교 위에서 뜨고 대호방조제 위로 진다.

/당진=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7대째 漢津포구 지켜온 방우진씨

"물이 다 빠진 밤중에는 호롱불을 들고 저 앞 갯벌을 건너 소라를 주우러 다녔죠. 가지고 간 그릇이 금세 다 차면 바지를 벗어 끝을 묶은 다음 소라를 가득 넣어 돌아왔습니다. 준치 삼치 꽃게가 많이 몰리는 4∼6월에는 전국에서 진짜 많은 어선들이 몰리기도 했어요. 그 시절 바다는 정말 풍족했습니다."

당진군 송악면 한진리에서 태어난 방우진(53)씨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한진 포구를 떠난 적이 없다. 7대째 이곳에서 살아왔고 최근 불어 닥친 당진 개발의 현장을 누구보다 생생히 지켜봤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곳 주민의 99%가 어업에 종사했어요. 그러다 92년 아산항이 개발되면서 대부분 상업과 공장에 취직하는 것으로 생계를 바꿨습니다. 당시 114가구가 42억원을 받으면서 평생 어업권을 포기한 것이죠."

그는 개발 이야기가 나오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은 게 사실이다. 공장은 외부에서 지은 것이니까 투자이익은 당연히 타인이 가져갈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주민이 지는 법이다. 92년 폐업 보상은 향후 생계까지 책임지는 전업(轉業) 보상이 됐어야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라고도 했다.

20여년 동안 바지락 양식과 바다 측량 일을 하며 어촌계장까지 지낸 그 역시 이 같은 변화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다. 지난해 9월부터 인근의 한 건축자재 회사에서 지게차 용역 일을 하고 있다. 지금 그에게 남은 어촌 사람의 흔적은 포구에 매어있는 1톤짜리 소형 어선과, 가끔씩 튀어나오는 조금 사리 창조 낙조 같은 물때를 일컫는 용어뿐이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희망적이다. "아직 한진에는 갯벌이 살아 있잖아요. 물이 마르면 포구 앞 150m까지 갯벌이 생기죠. 주말이면 이 갯벌에서 바지락과 조개를 줍는 갯벌체험관광단이 수도 없이 옵니다. 부둣가에 차를 댈 수 없을 정도죠. 선착장 바로 옆 과거 어선을 대던 곳을 메워 주차장까지 만들었어요. 더욱이 최근에는 귀한 꽃게까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관광어촌, 어쩌면 이것이 한진 포구가 나아갈 미래인 것 같습니다."

/당진=김관명기자

■ 충남 당진군 현황

위치-동은 아산만, 서는 서산시, 남은 예산군, 북은 남양만

면적-655㎢(충남 전체면적의 7.6%)

인구-4만150세대 12만818명

예산-2,158억원(2002년)

행정구역-당진읍 합덕읍 등 2개 읍과 석문면 송악면 등 10개 면

산업구조-농림어업(60%) 서비스업(22%) 제조업(18%)

제조업-사업체 236개 종사자 6,376 명 생산액 1조8,852억원

항만-송악부두(선석 18개) 석문부두 (17 개) 당진화력(2개)

문화재-영탑사 금동삼존불상(409 호) 등 보물 4개

관광-삽교호 함상공원, 왜목마을, 솔뫼성지, 안국사지 등

1일 관광객수- 9,191명(2001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