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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경주 양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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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경주 양동마을

입력
2002.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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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입구의 한 고가옥. 한복을 차려 입은 어린이 20여 명이 모여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소리 높여 읽고 있었다.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포항제철 지곡초등학교가 다음달 중순까지 열고 있는 예절교실이었다. 예법시간이 되자 어린이들은 "에헴" 소리에 턱수염을 만지는 시늉까지 하는 등 장난기가 발동했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양동마을을 둘러본 후 수료식을 하는 것으로 예절교육을 마친 이여진(11)양은 "인근에 이런 오래된 마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고 말했다.

양동마을은 150여 채의 고가옥에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 등 양대 씨족 300여명이 모여 사는 양반촌이다. 단풍이 물들고 있는 설창산과 성주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말 물(勿)자 형태의 산과 계곡에 기와집과 초가, 사당, 서원이 들어서있다. 관가정과 향단, 무첨당, 대성헌, 수졸당, 낙선당, 서백당, 사호당, 상춘헌, 심수정, 동호정 등 보물과 중요민속자료가 즐비해 1984년 동네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양동마을 문화유산해설사 이원걸(50)씨는 "국보 1점과 보물 4점에 200년 이상 된 고가만 54호나 되는 선비마을"이라고 소개했다.

낙엽을 밟고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 무첨당(보물 411호)에는 여강 이씨의 17대 종손 이지락(34)씨가 살고 있다. 양반가의 규수가 아니면 며느리 심사대상에서 아예 제외되는 가풍이 지금도 이어오는 집이다. "양동의 고가옥이 다 아름답지만 더 소중한 것은 500년 시간 속에 켜켜이 응축된 선비정신입니다. 건물은 뜯어갈 수 있지만 정신은 훼손되지 않지요." 이씨는 조상과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의 말대로 양동마을을 지켜온 것은 500년 전부터 인재배출과 예법, 건축 등 생활전반에서 벌여온 두 가문간의 명예를 건 경쟁이다. 전 양동마을보존관리위원장 손국익(69)씨는 "손씨 가문에서 청백리인 손중돈 선생이 배출되면 이씨 가문은 동방5현으로 칭송 받는 이언적 선생이 가문을 빛내고, 손씨가 관가정(보물 442호)을 지으면 몇 십년 후에 이씨가 향단(보물 412호)을 건축하는 식으로 양대 명문가는 공존 속에 경쟁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이 마을에서 문과 26명, 무과 14명 등 116명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양동 마을의 가치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을 다녀가기 몇 년 전인 1993년에 이미 양동마을은 그 여왕의 아들 찰스 왕세자를 손님으로 맞았다. "한국의 전통가옥과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된 마을로 안내해달라"는 주문에 따라 선비의 마을 양동은 소리 소문 없이 그를 맞아 조선의 정신을 각인시켰다.

이 마을에서는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하대(下待)를 하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중요한 것은 항렬과 촌수지 연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4년 전 포항서 이 마을로 이사 온 구미숙(具美淑·40·여)씨는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이 젊은 총각한테 말을 꼬박꼬박 높이는 걸 자연스럽게 느끼는 데만 1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지금은 옛말이 돼버린 '남녀칠세부동석'도 이 곳에서는 명맥을 잇고 있다. 부부끼리 저녁을 먹어도 남편은 아랫목, 아내는 윗목에서 독상을 받는다. 양동리 이두원(李斗源·52) 이장은 "자식들이 도시로 나가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도 겸상을 하지 않던 습관은 바꾸기 힘들다"고 말했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면 양동마을에는 매주 3,000여명의 관광객이 북적거린다. 인공의 때가 덜 묻은 문화의 보고(寶庫)라는 게 이 마을을 찾는 이유다. 입장료는 물론 주차비도 없다. 24시간 문빗장을 풀어놓은 채 낯선 이들을 반기고 있는 고가옥들을 둘러보다 보면 시골정취를 한껏 맛볼 수 있다.

심수정 인근에서는 경성대 사회교육원 사진예술반 학생들이 사라져가는 민속마을을 앵글에 담느라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1m가 넘는 카메라 삼각대를 이리저리 옮기던 최창희(46·여)씨는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까지 카메라에 담고 싶다"며 애착을 보였다.

부산의 한 백화점이 마련한 '가을로 떠나는 추억여행' 행사로 이 곳을 찾은 이옥선(58·여·부산 수영구 남천동)씨도 "500년 된 기와와 초가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낙엽을 밟으니 소녀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라고 활짝 웃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도 고민은 있다. 1930년대까지 천석꾼만 5명이 있었고 해방 후에는 300여 호의 가옥이 들어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경주 안강전투의 여파로 많은 가옥이 불타고 주민들이 도회로 대거 빠져나갔다. 지금도 상당수 젊은이들이 학업과 직장 때문에 서울과 부산, 대구 등지로 빠져나가 실제 양동에 사는 주민은 300명 안팎에 불과하다. 이두원 이장은 "양동마을 주변에는 논뿐이어서 주민들은 특산물 재배는 꿈도 꾸지 못하고 소규모 벼농사만 짓고 있다"며 "이 마을도 여느 시골처럼 평균연령 60대의 노인마을이 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양동 마을 주민들은 하회마을 얘기를 곧잘 꺼냈다. 최근 몇 년간 마을내 식당수가 4개로 늘어나면서 20여 개의 식당과 노점상이 난립한 하회마을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이라고 한다. 주민들은 "양동이 그나마 하회처럼 잘 알려지지 않아서 원형에 가깝게 보전되고 있지 상혼이 침투하면 끝장"이라며 "마을어귀에 유물전시관과 상가촌 등을 체계적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훼손되기 십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여기다 주변경관을 어지럽히는 전신주와 빨랫줄처럼 이어진 전선,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돼 문짝하나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없는 재래식화장실 등은 이 마을이 떠안고 있는 해묵은 숙제들이다. 한 노인은 "도회지에 살고 있는 손주 녀석들이 화장실이 불결하다고 명절이 되도 오기를 꺼린다"고 푸념했다.

행정당국의 엉터리 복원사업도 불만이다. 초가집에 기와로 담장을 쳤는가 하면 기와집에 초가지붕을 얹은 곳도 있다. 마을 청년회장 이석진(42)씨는 "관광객들은 그냥 스쳐 지나기 쉽지만 주민들 눈에는 건물복원 사업이 허점투성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글·사진 경주=전준호기자 jhjun@hk.co.kr

● 양동마을은

양동마을이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등 두 씨족에 의해 틀을 갖춘 것은 15세기 무렵이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등 양대 성씨를 대표하는 인물 모두 부친이 처가인 양동마을로 이사와 터를 잡으면서 부터다. 이 곳이 '외손마을'로 통하는 것도 이 때문.

양동(良洞)이라는 동네이름은 '어진 임금을 보필한다'는 뜻의 양좌동(良佐洞)에서 유래했으나 일제때 양자동(良子洞)으로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 마을의 가장 큰 축제는 정월대보름날 열리는 '줄다리기'. 온 주민이 참여해 1주일동안 줄을 꼬는 데 상대편 줄꼬기에 대한 염탐꾼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줄다리기의 전통이 이어져 대보름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안강평야의 농산물과 동해안의 해산물 등 주변에 산물도 풍성해 문어챗국, 육포, 칼국수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손님이 방문하면 반찬에도 뚜껑이 있는 '7첩반상'으로 융숭하게 대접했다. 여기다 집에서 찹쌀로 빚어 제사상에 올리는 '양동청주'는 단맛과 함께 느껴지는 꽃향기가 일품이어서 전통민속주로 전해 내려온다.

/전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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