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초반 김 여사는 요즘 지독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오고 달려오는 버스나 지하철만 보면 뛰어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30대 중반 남편이 바람 피워 이혼 직전까지 갔을 때도 이렇게 괴롭진 않았다.지난 1년간 그에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지난해 가을 갑자기 폐경이 왔다. 올 봄엔 딸이 유학을 떠나더니 얼마 전 아들마저 군에 입대했다. 남편의 무관심까지 포함하면 한 둥지를 틀고 살던 식구들이 여성을 잃어버린 자신만 남겨두고 모두 떠나 버린 것이다.
최근 김 여사처럼 '빈 둥지 증후군'에 시달리던 중년 여성들이 세상을 등지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달 4일 외동딸을 유학 보낸 40대 주부가 음독자살했고, 다음날에는 남편을 잃은 60대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아들을 유학 보낸 40대 주부가 열살배기 딸을 목졸라 숨지게 한 다음 자살을 기도한 사건도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빈 둥지 증후군, 즉 갱년기 우울증이었다.
갱년기 우울증이란 여성의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서 생기는 마음의 병이다. 그 동안 여성다움을 지켜주던 여성 호르몬이 급격히 떨어지고 자율 신경계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리며 성기의 위축, 현기증, 이명 같은 신체적 이상이 나타난다. 게다가 자녀 유학이나 군 입대, 남편의 무관심, 배우자와 부모의 죽음, 자녀 결혼 등 각종 스트레스가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도화선이 된다. 이 도화선에 조그만 불씨라도 튀게 되면 풍요로워야 할 제2의 인생은 한순간 잿더미가 된다.
다행히 김 여사는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꾀병이다", "편해서 생긴 병이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남편이 심각성을 깨달으면서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렸다. 갱년기 우울증은 가족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무조건 '힘내라'는 식의 조언은 마치 독감에 걸린 사람에게 "기침 좀 참아봐", "더럽게 콧물 좀 흘리지 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조언은 오히려 상실감만 가중시킬 뿐이다. 갱년기 우울증에는 '가까운 사람들의 관심'이 최고의 명약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가족들의 마음보다 좋은 약은 없다.
/정찬호 정신과 전문의·마음누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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