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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소설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스무살, 고통이 나를 갉아먹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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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소설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스무살, 고통이 나를 갉아먹을지라도…

입력
2002.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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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작품도 불륜에 관한 것이다. 전경린(40)씨의 소설에서 낯선 소재는 아니다. 여성에게 불륜은 종종 절망적인 삶에 대한 하나의 탈출구로 여겨진다.전씨의 소설 속 주인공은 대개 자신 또래였다. 결혼 십 몇 년 째, 아이를 둘쯤 둔 여자에게 남편 아닌 남자와의 사랑은 잠깐이라도 구원이었다.

그가 새롭게 펴낸 소설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문학동네 발행)에서도 여자는 기혼자와 사랑을 하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다른 것은 그 여자가 스무 살 대학생이고, 그 경험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마흔 살의 우수련이 기억하는 스무살은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고, 이 다음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몰랐던 때였다. 병에 걸려 구더기와 고름이 흘러나오는 할머니 때문에 뭉개진 집안을 뛰쳐나와 떠돌았다. 형제 같은 친구 성재가 있었고, 그의 소개로 연극 연출가 김해경을 만났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를 흥건하게 적시는 단어들. 극광 방랑 실존 소통 환영 초월 왼손잡이 나르시시즘 차라투스트라…. 스무 살의 기억은 그게 전부였다. "아침이면 늘 같은 자리에서 눈을 떴지만, 모든 방은 섬으로 떠가는 뗏목 같아서, 나는 밤새 물위에서처럼 노를 저었다. 말하자면 나는 아직 알 속에서 살고 있는 듯 이 세계에 대해 막연하고 어슴푸레하게, 하나의 추상으로서 둥둥 떠 있었다. 제 속의 노른자위를 파먹으며 한 마리 새가 되어가는 흰자위처럼." 제 속의 노른자위를 파먹는 것도 스무 살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를 아프게 갉아먹으면서도 그 아픔조차 느낄 새 없는 스무 살.

수련은 김해경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가 연출하는 연극 무대에 서기로 결심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빈둥거리다가 아르바이트 삼아 들어온 사람, 낮에는 공장에 다니고 밤에 연극 연습을 하러 오는 사람이 배우였다. 창녀의 자식으로 태어난 해경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사채업자 장모와 전문대 교수인 아내에게 묶여 있었다.

사회과학 코뮤니즘 주체사상 같은 단어를 빼곡하게 노트에 적어놓았던 성재는 구류를 받았고 군대로 끌려가야 했다. 연극 공연은 취소됐고 해경은 연행됐다. 수련과 해경이 함께 밤을 보낸 뒤였다. 한 남자에게 품었던 혼란스런 연정과 첫경험이 비수의 시절의 한 해를 채웠다. 성장통이 어찌나 컸던지 시대의 날이 얼마나 예리한 지도 몰랐다. 스무 살의 기록은 그렇게 끝났다.

"전부를 줄게. 전부를. 너도 나에게 전부를 다오." 전씨는 요즘 자신의 몸에 늘 그런 소리가 울린다고 말한다. 그 소리는 누구나 갖고 있을 스무 살의 기억이 지르는 것이다. 작가는 그때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고 했다.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라." 그러나 소설 속 우수련은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갔다. 성재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바닷가에서 작은 상점을 하고 살았다. 훌쩍 집을 나간 뒤 다시는 바닷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세상을 떠도는 여행사 일을 하다가 20년만에 김해경을 만났다. 해경이 묻는다. "시간은 흔적을 남길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다. 그 흔적을 보듬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의 얼굴은 무늬를 달리 한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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