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의 출범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프랑스의 구 화폐 프랑은 정감이 어려 있는 돈이다. 전체적으로 파스텔화 같은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색조부터가 그렇다. 화폐 위에 새겨진 문화 예술인들의 초상을 보고 있노라면, 교환가치를 지닌 은행권이라기보다 정교하게 제작된 문화 상품권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파리에서 근무하면서 프랑으로 지불할 때마다 돈이 아니라 문화상품권을 쓰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프랑화 지폐에 새겨진 초상은 문화 애호국인 프랑스답게 화가 음악가 작가 등 인류문화에 공헌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20프랑 지폐에는 음악가 드뷔시, 50프랑에는 '어린왕자'의 작가 생 텍쥐페리, 100프랑에는 화가 세잔과 그의 대표적인 정물화 '사과와 과자'가 그려져 있다. 또 200프랑에는 에펠탑을 설계한 건축가 에펠이, 최고액권인 500프랑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퀴리 부부가 새겨져 있다.
■ 사람들이 가장 자주 보는 그림은 아마도 지폐 위에 새겨진 초상화일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갑에서 돈을 꺼내다 보면 지폐 속 인물들에게 시선이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통상 그 나라에서 존경 받는 위인의 초상이 새겨지지만, 나라에 따라 위인의 선정 기준은 다르기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화폐의 위인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1달러)에서 벤자민 프랭클린(100달러)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인 일색이다. 종이쪽지에 불과한 돈에 최고 통치자나 국부(國父)로 숭상 받는 위인을 그려 넣어 인위적인 권위를 더하기 위함일까.
■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등 이 땅의 '화폐 위인'의 모습이 원화(原畵)로 전시되고 있다. 내년 2월9일까지 한국은행의 한은 갤러리에서 열리는 '화폐와 인물전'에서는 한지와 비단에 수묵 채색으로 그려진 이들의 영정을 만나 볼 수 있다. 우리나라 화폐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성군(聖君)과 대 학자, 구국의 영웅 등 다양하다. 반만년 역사와 유구한 문화에 걸맞은 위인들이긴 하지만 남성 일색인 것이 옥에 티다. 화폐 속 위인 선정에도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여전하다. 율곡을 길러낸 신사임당도 뛰어난 위인이었거늘….
/이창민 논설위원 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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