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1월29일의 청와대 오찬은 결국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의 이견만 확인한 채 끝났다. 나는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걱정됐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김 대통령에게 "강행 통과는 안 된다"는 소신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사태는 심상찮게 돌아갔다. 이튿날인 30일 김종필(金鍾泌) 대표는 당의 최종 방침을 밝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산안은 법정 기일 안에 통과시켜야 합니다." 김 대표의 발표 후 나는 김중위(金重緯) 예결위원장, 정시채(丁時采) 농수산위원장 등을 의장실로 불러 간곡히 당부했다. "날치기는 절대로 하지 마시오. 당도 욕을 먹겠지만 개인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 겁니다."
그러나 내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2월2일 농수산위원회에서 여야 의원들의 몸싸움을 빚은 끝에 정부의 추곡수매안이 날치기 처리됐다. 예결위원회에서도 날치기로 예산안이 통과됐다. 야당은 전면전을 불사할 태세였다. 본회의 날치기를 막기 위해 야당은 의원 및 보좌관들에게 총 동원령을 내렸다.
상임위에서의 날치기 직후 김영구(金榮龜) 총무가 나를 찾아 왔다. "의장님, 당의 확고한 방침입니다. 의장님은 날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국민과 약속했으니 정 사회를 맡지 않으시려면 사회권을 황낙주(黃洛周) 부의장에게 넘겨 주시지요." 나는 사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사회권을 쉽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야당 의원들이 의장실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아예 의장실에 진을 쳤다.
내가 본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국회가 아직까지 이런 모습이어야 하나…." 나는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날치기는 절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인으로서 사회봉을 넘기라는 당의 요구를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대신 이 사실을 정정당당하게 야당에게도 알려야 겠다.'
나는 여야 총무를 불러 사회권 이양을 통보했다. 조금 있으니 김영구 총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의장님께서 사회권을 넘긴다는 이양서를 하나 써 주십시오." 나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회권을 넘긴다고 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이양서를 쓰라니 그게 무슨 말이요."
전화를 끊은 뒤 나는 강성재(姜聲才) 비서실장을 불러 사회권 이양서와 함께 국회의장 사퇴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비록 내가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날치기가 되면 국민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강 실장은 펄쩍 뛰었다. "지금 사임하시면 국회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습니다. 정 뜻이 그렇다면 날치기 이후에 사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나는 강 실장의 조언을 받아 들여 사퇴서를 작성하되 날치기 직후에 제출키로 했다. 날짜가 언제가 될지 몰라 그 부분만 비워 둔 채 인감도장을 찍고 나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날 민자당은 날치기를 시도했지만 야당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예산안 통과에 실패했다. 나의 사퇴서도 내 책상 속에 그대로 있었다. 다음날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민자당은 어쩔 수 없이 야당과 협상을 하기로 방향을 틀었다.
여당 의원들의 원망이 잇따라 내 귀를 때렸다. "국회의장이 사회권을 넘기지 않는 것처럼 하고 양동작전을 펴야 했는데 사회권 이양 사실을 야당에 알려 주는 바람에 작전이 실패했다." 나는 한심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이후 여야는 끈질긴 협상 끝에 12월7일 예산안을 표결 처리했다. 나로서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대타협은 여야가 조금씩 양보하고 존중하면 여야가 모두 승자가 될 수 있음을 국민에게 보여줬다. 국회가 이처럼 원만하게 풀리자 연말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결과적으로 국회가 잘 됐다." 내 방법이 옳았다는 얘기 같아서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그제서야 마음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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