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요즘 에밀 졸라(1840∼1902)의 사후 100주년 기념행사가 한창이다. 그의 작품과 연구서가 대거 출판됐고, 6일에는 졸라가 살던 파리 근교 메당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추모자들의 문학순례가 있었다. 18일에는 파리국립도서관에서 졸라의 문학적 발자취와 생애, 당시 현실과 그의 작품의 관계를 소개하는 전시회 두 개가 동시에 시작돼 내년 1월19일까지 계속된다.비참하고 어두운 사회현상을 실험적 방법으로 관찰, 소설에 적용한 졸라는 자연주의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제2제정시대(1852∼1870)의 한 가족이 환경과 유전의 영향으로 다양하게 결정되는 현상을 20권의 '루공- 마카르 총서'를 통해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이 결정론적 서술방식은 상상력의 결핍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근래에는 심리분석 사회학 언어구조학 측면에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관심은 역시 10여년 간 나라를 뒤흔든 드레퓌스사건에서 졸라가 보여준 진실을 위한 투쟁이다. 드레퓌스사건을 포함, 당시 사회적 문제를 다룬 졸라의 글 모음집 '진실을 위한 싸움'이 출판됐고, 졸라 연구의 최고 권위자 앙리 미테랑은 작가의 마지막 생애를 '명예'라는 한 마디로 집약한 전기를 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삽화를 넣은 책은 '정열, 에밀 졸라 진실에의 열광'이란 제목을 달았다.
독일과의 전쟁(1870∼1871)에서 지고 반독일 감정이 잔재할 때 드레퓌스대위는 기밀을 독일군에 넘겼다는 죄목으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프랑스는 당시 왕정파와 공화파로 나눠져 있었는데, 대부분 가톨릭계인 왕정주의자들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들어 반유대주의를 고조시킨다. 졸라는 이때 신문에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을 싣고, 반유대주의를 비난한다. 편지 형식의 '나는 탄핵한다'라는 글이 신문에 게재되자 그 신문은 그날로 30만 부가 팔렸다.
이 글은 여론을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드레퓌스는 면죄됐다. 하지만 졸라는 감옥형을 선고 받고, 런던으로 유배되며 작품마저 외면당한다. 드레퓌스의 완전한 명예회복을 위해 계속 싸우던 졸라는 1902년 9월29일 돌연 질식사 하는데, 최근 나온 쟝 브델의 '암살된 졸라'라는 책은 반유대인파에 의해 암살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906년 마침내 졸라의 투쟁은 승리로 끝나 드레퓌스의 무죄가 공표되고, 1908년 졸라의 시해는 프랑스를 명예롭게 한 위인들이 묻혀있는 파리의 팡테옹 신전에 이장된다.
오직 진실을 위해 투쟁한 졸라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다시 집단적 감정에 맹목적으로 지배되기 쉬운 요즘 세계에 경계의 신호처럼 보인다.
조혜영 문학박사 재불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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