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쪽박은 깨지 말아야지. 왜 국책은행만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GM-대우차' 신설법인이 정식 출범한 17일 대우차 처리를 주도해 온 산업은행 정건용(鄭健溶) 총재는 뜻밖의 울분을 토해냈다. 시중은행들과 'GM-대우차'에 대한 금융지원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생긴 앙금 때문이다. 대우차 채권단이 당초 매각 본계약을 통해 신설법인에 지원키로 약속한 금액은 20억 달러. 하지만 계약서에 서명할 때까지만 해도 군소리 한 마디 없었던 시중 은행들은 정작 지원금 분담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선 "역마진이 우려된다"며 슬그머니 발을 뺐다. 우여곡절 끝에 신규 지원금의 대부분인 16억달러를 산은이 떠안는 조건으로 가까스로 파국은 면하게 됐다.
어렵사리 성사되긴 했지만, 현대상선 자동차운송부문 인수금융을 둘러싼 진통도 앞뒤 정황은 비슷하다. 불과 한 달 전만해도 인수금융 분배액을 늘려달라고 아우성이었던 시중 은행들은 '대북지원설' 파문이 일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참여의사를 철회, 현대상선의 유동성 위기를 초래할 뻔했다. 정 총재는 "은행들이 공익기능을 외면한 채 수익 제일주의와 보신주의에 빠져 있으면 결국 기업이 망하고, 나라경제가 죽는다"고 개탄했다.
금융기관이라고 공공성만 추구하라는 법은 없다. 수익을 내지 못 하는 은행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 유산(부실기업)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과 수익성 추구는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골치 아픈 숙제는 남에게 맡기고 어물쩍 '과실'만 챙기려는 태도는 분명 방임이자 배임이다. 하이닉스, 현대투신 등 부실기업처리 문제가 아직 산적한 상태에서 은행들이 눈앞의 이익만 좇는다면 정 총재의 말마 따나 "기업구조조정은 이제 물 건너 간 것"이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변형섭 경제부 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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