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겨울, 감옥에서 나온 김지하(61) 시인은 '생명운동'이라는 화두를 세상에 던졌다. 우리 민중사상의 뿌리를 찾아 나선 사상 기행의 시작이었다. 동학과 증산도의 길을 따라 그의 발걸음은 계룡산으로, 우금치로, 모악산으로, 황산벌로 옮겨갔다. 1990년대 말 오랜 병고 끝에 그가 이른 곳은 '율려(律呂)'였다.
'김지하 사상전집'(전3권·실천문학사 발행)이 출간됐다. 원고지 7,500매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철학, 사회, 미학 부문으로 나누어 묶었다. 전집 발간에 맞춰 25일 오후6시 한국일보사 13층 송현클럽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사상전집 제1권 '철학사상'에서 그는 동학의 최제우와 증산도 강일순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테야르 드 샤르댕, 질 들뢰즈 등의 서양 이론을 넘나들고, 마침내 '율려'라는 개념에 다다른다. 16일 오후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그는 율려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율려는 음양의 조화를 말합니다. 우리 전통 음계에서 율(律)은 양(陽)이고 려(呂)는 음(陰)입니다.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해요. 강증산은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율려가 다스리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요." 대립되는 것을 끌어안는 조화. 김씨가 이 혼돈의 사회에 온전하게 세워질 수 있는 중심으로 제기한 것이기도 하다.
제2권 '사회사상'은 사회운동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글모음이다. 우리 사회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 생명·환경운동의 사상적 기초, 주민 자치의 실천방안과 통일에 요구되는 철학 등을 담았다. 저항적 지식인으로서의 그를 만날 수 있는 부문이기도 하다.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참가해 쓴 조사 '조(弔)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 ', 민청학련 사건 당시 법정에서 최후 진술한 '나는 무죄이다' 등이 제2권 4부에 수록됐다. 민족적>
제3권 '미학사상'에는 문학과 미학, 예술에 대한 그의 사유가 담겼다. 그가 제시하는 미학 개념은 난해하다. "자기 내면의 무의식, 초의식을 따라가는 여행에서 찾아낸 질서의 빛, 고대로의 탐색 여행에서 찾아낸 유산을 새롭게 해석한 과거로부터의 빛, 이 두 빛이 미학의 핵심 관념이다." 그의 생각은 그의 말보다 앞서간다.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김씨의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김지하 사상전집은 훌륭한 자료가 된다.
김씨는 "사상전집이라지만 내 얘기는 이론을 촉발하는 초급 담론"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학문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창작을 위한 상상력을 촉매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 그이다. "노자에 '불소비도(不笑非道)'라는 말이 있소. 비웃음을 받지 않으면 그 시대의 사상이 아니라는 뜻이지. 무능한 사람이 자기 위안을 하는 말이겠지만"이라면서 김씨는 웃는다.
제3권에는 투쟁하는 시인으로 1970년대를 살았던 시절 남긴 각종 문건과 일기 등도 함께 실려 있다. 그때 그의 이름은 곧 반체제의 상징이었다. 시간이 그를 변화시킨 것 같다. "젊었을 적에는 토하듯이 시를 쓸 수밖에 없었지요. 고뇌할 사이도 없이 울컥 터져나오는 것 말입니다. 가령 (김)남주가 쓴 시가 좋은 작품이었는지, 칼 같은 시가 훌륭한 것인지 나는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은 변하지 않았다. "4·19 혁명,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스러졌는지요. 그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붙잡았던 정신의 근간을 찾고 과학적인 개념으로 세우고 싶어요. 나는 사상적 탐색을 통해 그들의 역사적 위상이 세워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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