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미스 스윙.조석으로 가을이 몰아쳐 제법 선선해졌구나. 하오의 햇살 곁에 앉았지. 날 놀려대면서 까무룩 자지러지는 네 웃음소리 들리누나. 이 목수 아저씨 흉내를 내느라고 발을 통통 까불리며 "오케이!" 하고 톡톡 튀게 내쏘던 네 그 목소리도 말이다.
이번에 펴낸 책 '카르마'의 무대가 되는 마을의 고개 너머에 너는 살았었지. 서울에서 우연하게 널 다시 만나기 전 갑자기 네가 궁금해져 지프를 몰아 강원도까지 내리 달려간 적이 있지. 넌 이미 오래 전에 서울로 유학을 떠났으며, 가족들은 뿔뿔이 객지로 흩어지고 네 외할머니만 집을 지키고 있다더구나. 느티나무 앞에다 차를 세우고 사나운 비바람을 맞받으면서 소주를 들이켜며 밤을 지새고 돌아왔지.
인연이란 참 모를 일이지? 그런 일이 있었으니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 뒤 서울에서 용케도 다시 만나게 된 걸까. 뜬금없이 넌 전생에선 나와 모종의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지?
해발 700m 고지 첩첩오지의 그 불구자 사내 집으로 놀러오곤 했을 때 넌 눈매가 잘 익은 머루 빛깔이었어요. 서울에서 재회했을 때 네 눈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곤 놀랐지. 어린 시절의 널 눈 큰 아이로 기억해두고 있었거든. 그토록 쬐그맣던 계집아이가 말쑥한 이십대 처녀로 변해버렸으니 얼마나 반갑고 놀랍던지. 그 불구자 사내 집으로 네가 이따금씩 놀러오곤 하던 그땐 네 나이에다 삼을 곱하면 내 나이였는데, 서울에서 다시 만났더니 넌 내 나이의 절반이더구나. 너무 신통해 우린 얼마나 웃었더냐.
스윙, 참, 잊기 전에 이 이야기부터 해두자. 내가 새벽마다 산을 오르는 이유를 넌 모를지도 몰라. 단순히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니지. 두 가지 이유에서야. 하나는 내 직업하고 관련된 거고, 나머지는 널 쌩쌩하게 만나기 위해서라고 고백하고 싶구나. 머리숱이 희끗희끗 서리 날리기 시작한 목수 사내가 튼튼한 집을 짓자면 심신이 단단하지 않으면 안돼. 집 짓는 이력이 근 25년이구나. 근력을 키우고 백태가 끼기 쉬운 의식의 눈을 맑게 가다듬어야 하니까. 널 마주하기 위해선 왜 튼튼해야 하느냐고?
너는 발랄하니까. 넌 서울에서만 공연하는 연극 영화 기타 등등 공연물을 보려고, S시로부터 자동차를 몰고 네 시간 만에 총알같이 달려오곤 하니까. 넌 잡을 수 없이 빠르니까. 넌 요시모토 바나나와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니까. 넌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도 곧잘 보내고 넌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거품 커피랑 피자를 좋아하니까. 넌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책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요리조리 바쁘게 날아다니니까. 숱한 남자 친구들이 또한 널 에워싸고 있으니까. 그러면 나?
어가는 목수로서 대패질이든 망치질이든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니까. 내게도 신명이 남아 있어요, 제발. 그러니 몸 쓸 일이 생기면 신명나게 신체를 놀려야 하니까. 너도 좀 알고는 있으리라만 내가 지어왔던 집들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구나. 보석(寶石)의 마음이 들어있는 집을 짓는 일이 궁극적인 목표지. 황혼에 사위어가는 내 집을 보고 사람들이 슬퍼하며 눈물짓고, 지즐대는 새들과 햇빛 반짝이는 잎새들로 둘러싸인 내 집 안에서 사람들이 기쁨에 겨워할 그런 집을 말이지. 집을 둘러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흔치 않은 귓속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지. 진짜배기로 세상 사랑하는 법을 전해줄 메시지를.
스윙이여, 넌 알고 있겠지. 내가 어이하여 오늘 이때껏 마음의 집 짓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이따금씩 번민에 휩싸이곤 하는지를. 최근 새로 지은 '카르마'란 제목의 이 집은 여태껏 지어 올린 집들 가운데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이에요. 현세적(現世的)인 안목으론 넘볼 수 없는 그 어떤 다른 무언가를 그 집의 영혼에다 불어넣으려 애썼거든. 세속의 관심 그 너머, 우리 눈과 의식으로 가늠해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비의(秘義)를 간직한 집이라 감히 말해도 될는지. '머나먼 쏭바강'이나 '우묵배미' 연작들로는 성에 안 찼었지. 그것들은 아무래도 이 지상의 질료들로 구조된 집들이었지. 이번의 새 집은 생과 사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범신론(汎神論)의 어떤 지점과 교신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이는구나.
서울에서 우리가 재회하게 됐을 때, 어떤 이유로 네가 나를 믿고 의지하게 됐는지 난 좀 알고 있어요. 그건 내가 짓는 집들 속에 해답이 들어 있다고 말해야겠지? 신명이 솟구치면 목수는 대패질과 망치질을 시작하지. 그는 지어 올리고 싶은 자기 세계가 있으니까. 그걸 못하게 되면 그는 존재가치를 잃게 되고,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작가 사내처럼 풍토병 같은 데 걸려 온몸이 썩어 들어가니까. 진실로 '진정한 의미의 인간들'이 모두 다 못 말리는 무당이듯이 진정한 목수 역시 못 말리는 무당이겠지. 신명, 그건 곧 내 속에서 움터 자라 새로운 집으로 완성되어 주기를 바라는 생의 불꽃이요, 그건 또한 목수의 운명을 목수의 운명답도록 강인하게 뒤받쳐주는 그 무엇일 테지. 나는 원래 재능의 면에서는 목수 재질이 아니었지만 거칠고 고단한 삶을 거쳐오면서 목수로서의 이력을 쌓은 거라 생각하곤 하지. 그래, 목수가 아니었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을 거니까.
참, 너와 내 주위의 그 누구나 우린 전생에 어떤 인연으로 옷깃을 스친 사이였다는 걸 넌 요즘에사 뒤늦게 인정하기 시작하더구나. 우리? 우린 당연히 옷깃만 슬쩍 스친 사이 정도는 아니었으리. 만약 그랬다면 왜 네가 들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내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던가를 설명할 수 없어질 거야. 넌 언젠가 내게 보낸 메일에서 이렇게 나를 뒤흔들어놓고야 말더구나.
"난 언제나 대장(隊長)의 거소 주위가 걱정스러워져요. 어젠 대장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대장 작업장 주위라도 밟아보고 싶어서 강을 끼고 마구 달려갔지요. 강은 작업장 저만치서 무심히 흘러가고 역시나 대장 없는 집은 쓸쓸하기만 하더군요. 대장이 먹이를 주면 그토록 많이 날아들던 새들도 안 보이고 자주 놀러오던 들개도 들고양이도 기척이 없더군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작업장의 나무토막이며 못통을 들고 요렁조렁 만져보다가 부엌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서려는데 어둠 속에서 들고양이가 사뿐거리며 걸어나오는 거지 뭐예요. 따로 해먹일 건 없고 해서 달걀 프라이를 구웠죠. 베란다 난간 앞의 제 밥그릇에다 가만히 내려놓았죠. 제 그릇을 주인도 아닌 내가 만지는데도 반가와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라구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은 나는 그만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말았어요. 야생의 것들을 그냥 그대로 두시지, 왜 인연을 만들어서 새들과 들고양이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는 거지요? 집 지을 궁리로 여기저기 바쁘게 나다니시면서, 늘 돌봐주지도 못할 거면서, 뭐 하러 불쌍한 것들과 인연을 맺느냔 말예요. 저 영리한 고양이는 낮 동안 사냥감을 보고도 고개를 돌렸을지 모르잖아요. 대장이 갑자기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요. 주인이 주는 음식 양만큼은 항상 위장을 허기로 비워둘 거잖아요. 야생의 것들을 야생의 상태로 그냥 놔두었더라면 고양이든 개든 더 행복하고 더 평화로웠을 거예요. 굳이 주인을 기다리지도, 허기를 남겨두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너무 가슴이 아프고 대장이 원망스러웠어요."
한동안 네 야생의 들판으로 달아나 내게 가까이 올 생각을 않더구나. 아니, 넌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서 달아날 생각만 하는 거지? 아무렴. 그래도 내겐 할 말이 없어요. 내 마음의 적설(積雪) 위에다 넌 순결한 토끼 발자국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떠났구나. 우리가 나눈 그것은 흔히 세인들이 이르는 '사랑'이란 것과는 약간 다른 명명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넌 이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요번 겨울 시골 구석에 틀어박혀 스윙, 너의 그 가슴 아픈 이야기를 쓰겠다고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하마. 보상 없는 사랑 이야기, 그 무지막지한 폭풍, 그 하객 없는 황량한 신전(神殿)에서의 혼례식 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거듭날 수밖에 없었던… 그 희망과 좌절, 푸른 풋콩 비린내 나던 너의 시샘, 제어할 수 없던 질주에 관한 이야기를. 알레그로 비바체의 폭풍 같은 필치로. 그날들을 되살릴 수 있으려나. 새 집을 짓기 전엔 늘상 이토록 마음이 설렌단다.
● 연보
1947년 경남 합천 출생
1977년 연세대 국문과 졸업·'세계의 문학'에 장편 '머나먼 쏭바강' 발표 등단
2001년∼현재 동의대 문예창작과 교수
장편 '머나먼 쏭바강' '인간의 새벽' '노천에서' '우리는 중산층' '키릴로프의 연인' '장강' 연작 '왕룽일가' '우묵배미의 사랑' 중편 '지상의 방 한 칸' '카르마' 등
오늘의작가상(1978) 동인문학상(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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