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라는 화두(話頭)가 일상적으로 된 지 오래 되었다. 게다가 근래에는 자연계뿐만 아니라 이공계의 위기까지 급속도로 퍼졌으며, 우리 모두 살갗으로 느끼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부존자원이 부족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여 국가발전을 추진하였고 열매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과학기술분야의 고급인력이 양성되지 않으면 IT 강국의 명성을 곧 중국 등 후발국에 내어줄 것이라는 우려가 사실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를 더욱 서글프게 만드는 것은 인문학에 대한 무관심과 박대이다. 이제 인문학은 침체가 아니라 전멸의 상태이며, 그 결과 우리의 정체성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이공계·유학 우선지원에 허탈
직접 부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응용분야에 인재가 집중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며 또 비난할 수도 없다. 다만 특정분야에 인재가 몰리지 않고 고루 흩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인문학 등 기초분야는 물론 응용분야의 학자도 한 순간에 탄생되지 않으며, 지속적인 관심과 안정적인 투자 및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적 투자는 산업구조가 급변하는 오늘날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하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정부 차원에서 두뇌한국21(BK21)사업 등 학문후속세대의 양성과 전문연구자를 위한 다양한 지원책이 마련되었으며, 또 민간차원에서도 대규모의 장학재단이 탄생하여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고 곱새겨 보면 여전히 허전함이 와 닿는다. 이공계와 외국유학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사실은 찬바람으로 가슴을 세차게 때린다. 이공계의 지원은 기술혁신으로 국가경쟁력을 향상시켜 전체 국민의 삶을 질을 높이려는 발전전략에 부응하는 불가피한 선택이리라.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모자람이 있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시대의 조류는 세계화이다. 세계화는 지구적 차원에서 통일을 강요하고 있다. 획일화가 판치는 지금, 인문학의 육성과 학자의 양성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인문학은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하는 기반이 된다. 민족정체성의 확립은 민족의 생존과 다양하고 활력 있는 세계화의 밑거름이 된다. 우리를 되돌아보자. 광복 후 약 60년, 두 세대가 지났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오밀조밀하게 그려낸 학자를 아직 알지 못한다. 왜 이 땅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갈 바를 제시한 학자가 없었을까? 우리의 학자 양성 시스템에 문제점이 있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 없다.
이제 늦었지만 우리도 세계적인 학자를 탄생시킬 때이다. 그 동안 자연과학 계통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를 고민하고 사색을 통해 우리를 깨우치는 인문학자마저 외부로부터 수혈해 왔다. 이는 좌절된 근대화라는 역사적 실재에서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원죄이다. 그러나 두 세대의 학자가 배출된 지금까지 역사에 허물을 돌리기에는 얼굴이 붉어진다. 이제 눈을 안으로 돌려야 할 때이다.
석학의 국내배출 힘쓸때
물론 분야에 따라서는 외부 수혈이 불가피하며 지금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의 고민을 해결하고 이를 풀기 위해 바깥의 머리를 빌려와야 할까? 이제는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학자를 길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척박한 이 땅에서 자기와 남, 우리, 그리고 인류 모두에 대해 고민하는 학자를 양성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이 땅에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마음 편히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적인 지원정책이 더욱 절실한 때이다.
나는 그 날을 꿈꾼다. 혼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한결같은 꿈이기를 빌며. 이 땅에서 세계적인 학자가 태어나기를. 이 땅의 젊은 학자들이여! "꿈★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꿈을 반드시 이루시기를.
정 긍 식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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