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시인 고은씨가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점쳐졌다는 사실은 우리 문단에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시인의 행보가 그랬다. 떠도는 것이 삶이었지만, 최근 그는 어느 때보다도 분주했다. 한해의 3분의2 이상을 해외에서 열리는 시인대회와 문학강연, 시 낭송회에 참가하면서 해외시단으로 발을 넓혔다. 서양 언어권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한국시인이라는 평이 나올 정도로 그는 세계적인 지명도를 갖게 되었다.그의 전집(김영사 발행)이 다음 주에 출간된다. 시집 14권, 산문집 7권, 자서전 3권, 소설 7권, 기행문 1권, 평론과 연구서 5권 등 전38권에 이르는 분량이다. 원고지 12만매, 2만3,000여 쪽으로 준비기간 3년, 실제 편집기간 2년이 걸렸으며 편집에 100여 명이 매달렸다. "출판계 최대 사업"이라고 출판사는 설명한다. 평론가 백낙청씨는 시인의 활동을 두고 "독자가 일일이 따라 읽기 벅차고 그러다 보면 아예 안 읽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엄청난 다산성을 가리킨 것이다. 이 방대한 전집의 발간을 맞아 30일 오후6시30분 한국언론재단 프레스센터에서 출간기념회가 열린다.
고은 시인은 올해로 고희(古稀)를 맞았다. 그의 시력 44년의 뒷장은 한국 현대사다. 등단 초기 유려한 감수성을 시로 옮기는 탐미주의적인 시인이었던 그는 1970년대 들어 역사의식의 출발을 선언한다. 그 자신 "작가의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절감했다"고 전집의 연보에 적은 시기다. 문인 간첩단사건 구명운동을 주도했고,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된 김지하의 석방운동을 벌였다. 경찰서와 정보부의 '고객'이 되어 허다하게 유폐되는 것으로 70년대를 보냈다. 74년 펴낸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 표제시의 몇 구절.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文義(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
80년대 시인의 작업은 '백두산'과 '만인보'로 기억된다. 5만2,000행, 전7권의 서사시 '백두산'은 항일무장투쟁에 몸바친 가족 2대의 삶과 투쟁을 그린 대작이다. 70년대 이후 우리사회에서 명멸한 인물들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만인보'는 지금도 계속 쓰여지는 연작시다. '보아라 우렁찬 천지 열 여섯 봉우리마다/ 내 목숨 찢어 걸고/ 욕된 오늘 싸워 이 땅의 푸르른 날 찾아오리라'('백두산' 서시에서).
사회의식은 90년대 들어 선시(禪詩) 작업과 맞닿으면서 깊이를 더해간다. 올해 초 펴낸 시집 '두고 온 시'는 그렇게 깊어진 시 세계에 취하는 한편,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시인의 힘을 절감할 수 있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두고 온 듯/ 머물던 자리를 어서어서 털고 일어선다/ 물안개 걷히는 서해안 태안반도 끄트머리쯤인가'('두고 온 시')
"순수라는 미망과 참여라는 교조는 그것을 다 넘어서서 새로운 생명력을 발휘할 문학의 역설적인 두 지표다." 전집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그래서 자신의 문학은 "현실과 현실 너머의 그 어떤 것이라는 두 장(場)의 상호 교향"이라고 시인은 긴 행로를 중간 결산한다.
전집 중 시인이 적은 '전생 연보'가 눈길을 끈다. 그는 먼 옛날 세습 방랑시인이었으며,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의 친구였으며, 술집 주모로, 일자무식 나무꾼으로도 살았단다. 2002년 10월12일 시인은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한국일보가 기획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내 문학은 폐허를 떠도는 자의 비가(悲歌)이기를 자처한다"고 답했던 고은 시인. 전생에서부터 이생에 이르기까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방랑한다. 인간 고은이 그러하고 그의 문학이 그러하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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