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경기 양주군 광적면 효촌2리 56번 지방도 갓길에서는 추모비가 옮겨지고 있었다. 정확히 4개월 전 이 곳에서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한 14살 동갑내기 여중생 심미선, 신효순 두 소녀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였다.대리석 기단은 열주(列柱)를 뽑아내느라 드문드문 금이 갔고 비석은 크레인에 집혀 생채기가 날 판이었다. 측량 잘못으로 버젓이 주인 있는 땅을 차고 앉은 게 실수였다. 한적한 지방도 변에 모텔을 올리려던 땅 주인은 부지 앞을 가로막은 '어이없는' 구조물에 대경실색했다고 한다. 주민들 간에는 '야박하다'는 쑥덕거림이 있었지만 '막상 땅 주인 처지면 그럴 만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초여름에 죽은 소녀들은 가을이 되어도 영면(永眠)하지 못했다.
▶4개월이 흐른 뒤
소녀들의 죽음으로 뒤숭숭했던 경기 북부 지역은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다. 미군의 훈련이 잠시 중단돼 좁은 2차선 도로를 메웠던 무한궤도의 굉음이 잦아들었고 분기탱천했던 시민단체와 대학생들의 방문도 뜸해졌다.
3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소녀들의 마을 효촌리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차츰 악몽에서 벗어나면서 두 소녀 이야기를 극구 꺼렸다. 어렵사리 입을 연 한 주민은 "미군이 있으니까 그나마 우리나라가 있는 것 아니냐. 아이들 죽은 건 안됐지만 서울에서 올라온 (시민단체) 사람들처럼 막무가내로 그러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다른 주민은 "의혹이 많은 만큼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소녀들의 부모는 사고 사흘째 되던 날 사회 단체의 만류를 뿌리치고 소녀들을 화장했다. 미선이 아버지 심수보(沈洙輔)씨는 "사인(死因)은 정부가 알아서 잘 규명해 줄 것으로 믿었다"고 했다. 하지만 소녀들의 부모가 믿었던 우리 사법기관은 4개월여가 지나도록 소녀 부모들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사고원인
효촌2리에서 함께 나고 자란 소녀들은 그날 생일파티를 위해 500여m 떨어진 친구집을 찾아가다 미2사단 소속 장갑차의 무한궤도에 차례로 짓밟혔다. 부교 운반용 장갑차의 무게는 5만4,000㎏이었다. 차량의 폭은 차로보다 30㎝가 넓었다.
미군은 6월19일 발표한 사고 조사 결과를 통해 장갑차가 소녀들의 마을을 지나 오른쪽 굽이 오르막길로 시속8∼16㎞의 속도로 오르고 있을 때 30m앞 갓길 위의 두 소녀를 통제병이 발견했지만 혼선과 소음으로 운전병에 알려주지 못해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다. 한국 검찰도 8월5일 "사고원인은 운전병과 통제병간 통신기기 고장이 원인"이라며 한국 사법기관 차원의 수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소녀들 부모는 여전히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사람 뛰는 빠르기의 장갑차가 30m 앞에서 소녀들을 발견하고도 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운전병의 사고 당일 진술은 "통제병의 고함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붉은 옷이 눈에 들어와 멈췄지만 이미 늦었다"였다. 장갑차가 그 속도로 달리다 멈췄다면 붉은 옷 윗도리 미선이는 몰라도 앞서 걷던 효순이는 살릴 수 있어야 했다는 게 부모들의 의문이다.
그 사이 주한미군은 과실 치사혐의로 기소된 운전병과 통제병에 대한 1차 심리를 지난달 26일 조용히 열었다. 통제병은 이날 변호사를 통해 무죄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검찰이 사고원인으로 지목한 통신장비 고장을 미군은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붉은 옷을 봤다" "30m 전방에서 봤다"는 운전병과 통제병의 최초 진술과 "보지 못했다" "15∼20m 전방에서 봤다"는 미군의 발표가 왜 다른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사권 없는 한국의 공권력은 더 이상 이것을 밝혀낼 수 없다.
▶"미군을 어떻게 믿어요."
소녀들이 죽어간 56번 지방도는 미군과 한국군의 이동이 빈번한 곳이다. 사고 당일에도 미군 장갑차는 이 길을 따라 양주군 무건리 훈련장을 떠나 덕도리 삼거리 집결지로 이동 중이었다.
차폭 보다 넓은 차량의 운행은 한국의 도로교통법 위반이었다. 장갑차 앞에 안전요원을 배치하지 않은 것도 미군 작전교리 위반이었다. 부대이동을 사전에 주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규정도 있지만 미군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고 직후 미군은 8군 차원에서 주한 미군의 훈련지 이동시 장병들을 대상으로 철저히 안전교육을 시키고 인접 마을에 사전 통보하는 것은 물론, 안전요원 배치 등의 규정을 준수하겠다는 다짐을 내걸었다. 미 2사단 정문 앞에도 이 같은 내용의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주민 홍기식(54)씨는 "기본적으로 한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미군들의 생각이 그대로라면 별로 바뀔 게 없지 않겠느냐"며 냉소를 흘렸다. 의정부역 앞에서 만난 오정환(32·의정부시 가능1동)씨는 "그렇게 재판권을 넘겨달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미군인데 글쎄…"라며 뒷말을 흐렸다. 주민 대부분은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이 이전처럼 공무를 수행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녀들이 숨진 지 4개월이 지났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56번 지방도 굽이 마다 반사거울과 갈매기 표시가 새로 꽂힌 것 뿐이다.
/양주=이동훈기자 dhlee@hk.co.kr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이젠 정말 잊고 싶다"/효순·미선 다니던 학교 악몽 벗어나 안정 찾아
'푸른 빛이 짙어가는 6월! 학교 앞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효촌초등학교 돌고래반(6학년) 교실 앞 복도에는 울창한 녹음을 담은 효순이의 수채화가 아직 걸려 있다. 2년 전 "그림 실력이 늘어 기분이 좋다"던 효순이가 남긴 흔적이다.
10월의 따사로운 햇살과 솜털 바람을 가르며 운동장을 뛰놀던 아이들은 "그 누나들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며 미끄럼틀을 오른다. 전교생 79명을 공포로 내몰았던 4개월 전 사고의 악몽을 아이들은 벌써 훌훌 털어버린 듯하다.
두 소녀의 넋을 기려 '봉숭아가 졌다'며 추모시를 읊던 교장 선생님도 학교를 떠났다. 그들의 담임이었던 홍성찬(洪性贊·45) 교사는 "진실이 밝혀지고 사후 대책이 마련돼야겠지만 이제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이 32-1 버스를 타고 다녔던 조양중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2학년 1반, 8반에 있던 두 소녀의 책걸상은 창고로 자리를 옮겼다. 몰려드는 취재진과 온갖 유언비어에 몸살을 앓았던 교사와 학생들은 한결같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한 교사는 "교사들뿐 아니라 아이들도 마음 고생이 많았다"며 "효순이는 참 그림을 잘 그렸는데…"라고 마지막 기억을 되살리려다 입을 닫았다.
당시 사고에 대해 묻기라도 하면 마을 사람들은 "이제 잊을 때도 됐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50대 아주머니는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데 자꾸 들먹여서 좋을 게 뭐냐"고 따져 묻는다.
효촌초등학교 현관 앞에 걸린 전교생 기념 사진엔 지금도 여전히 효순이와 미선이가 꼭 붙어 앉아 활짝 핀 코스모스처럼 웃고 있다.
/양주=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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