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境界人… 고국 땅 못밟아도 신념을 버릴순 없다""내가 서울 땅을 밟으면 무슨 난리라도 일어난답니까."
송두율(宋斗律·58)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과 교수는 35년 동안이나 밟아보지 못한 고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친북 인사'로 낙인 찍혀 번번이 귀국이 좌절됐던 그는 16일부터 열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공안 당국의 입국 불허 방침으로 또다시 고국행을 포기해야 했다.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현재의 심경과 "평생 고국 땅을 밟지 못한다 해도 나의 신념과 철학은 버릴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35년 만의 귀국이 또 좌절됐는데 현재의 심정은.
"몇 번 거듭된 일이지만 정말 실망이 크다. 남북관계도 호전돼 이번에는 꼭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인천공항에 내렸다가 되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귀국을 강행할 생각이었지만, 주최측에서 초청을 취소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 내부에 냉전적 사고가 여전히 뿌리깊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 귀국하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
"1996년 작고하신 아버님 산소를 찾으려 했다. 아버님께서 5형제 중 장남인 나때문에 소위 연좌제에 걸려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준법서약서라는 것을 쓰고라도 귀국할 작정으로 난생 처음 친구들에게 정부 요로에 알아봐달라고 부탁도 했다. 헌데 아버님께서 '네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데 나때문에 신념을 꺾느냐'며 한사코 반대하셔서 결국 임종도 하지 못했다. 마침 새 책 '경계인의 사색'(한겨레신문사 발행)이 출간돼 친구들과 술잔 기울이며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가질 계획이었다."
―공안 당국이 준법서약서를 조건으로 내걸었다면 응할 생각이었나.
"준법서약서가 어떤 형식인지 나는 모른다. 추측컨대 법을 지키지 않았던 과거에 대한 반성을 담은 것일 텐데 나는 법을 어긴 적도, 반성할 과거도 없다. 종이조각 하나로 나의 양심을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묶어두려는 구 시대적 발상에 절대 응할 수 없다."
―새 책 '경계인의 사색'에는 어떤 내용을 담았나.
"나는 스스로를 '경계인'(境界人)라고 부른다. 남과 북 사이, 나의 자리는 체조선수가 선 폭 13㎝의 평균대보다 좁다. 이 폭이 더 넓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통일에 대한 여러 생각, '내재적(內在的) 방법론'으로 들여다본 북한 사회의 오늘과 내일, 이를 뒷받침하는 나의 철학을 담았다. 요즘 베를린의 여러 영화관에서 '공동경비구역JSA'가 상영되고 있다. 지뢰를 밟은 남쪽 병사와 그 지뢰를 해체하는 북쪽 병사가 공존하는 '공동경비구역'이 한반도 전체로 확산된다면 휴전선은 사라지지 않겠는가. 이편, 저편을 가르는 경계선 대신에 모두를 '배제하고 통합하는 제3의 공간'을 찾고 넓혀가는 것이 남북으로, 동서(영호남)로 갈린 한반도, 나아가 문명충돌, 자연과 인간의 갈등으로 부대끼는 지구촌을 살리는 희망의 철학이 아닐까."
―당신이 '친북 인사'로 오해를 받는 것은 남한 정부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북한사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북한사회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을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의 논리를 따라, 그들의 언어로 그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내재적 방법론'인데, 마치 북한을 무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혹자는 내게 왜 북한의 인권문제를 외면하느냐고 비난하는데, 최근 방북 때 경제적 문제로 국경을 넘은 탈북자들을 망명으로 내몬 현실을 지적하고 사면 조치할 것을 건의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송두율=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주장한 황장엽씨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겼지만 의심의 눈초리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것 같은데.
"재판에서는 어떤 주장을 편 쪽에서 먼저 증거를 대야 반박을 할 텐데, 황씨는 '심증'외에 이렇다 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반박을 통해 사실을 명백히 밝힐 기회가 없었다. 나는 김철수도, 노동당 간부도 아니다. 누군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라면서 김용순 당비서보다 높다고 하더라. 내가 진짜 그런 지위에 있다면 그걸 이용해 남북관계 개선에 힘썼을 텐데. 김용순 비서도 마음대로 오가는 남한에서 입국조차 거부당하겠느냐.(웃음)"
―최근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민주화운동'인정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민주화가 오히려 무질서와 반목을 불렀다는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1979년 부마사태, 87년 6월 투쟁은 과거 정권에 치명타를 안겼지만 야권의 내부분열로 호기를 놓쳤고 그 부정적 후과(後果)는 최초의 문민정부, 헌정사상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룬 현 정부의 업보로 계속 남게 됐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함성대신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커진 것이 사실이지만 '탈정치' 분위기도 비례해 확산됐다. 이 틈을 타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식의 주장을 펴는 세력이 과거 독재와 폭력을 미화하고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감옥에 가고, 고문으로 당신 자식들이 죽음을 당하는 그런 사회에 다시 살고 싶은가'라고."
―김대중 정부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진짜 개혁을 위해서는 자신까지 포함하는 개혁을 했어야 한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남북관계 개선 등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심한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냉소주의인데, 이것처럼 치유하기 힘든 병이 없다. 정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심각한 병이다. 유일한 치료방법은 충격요법인데 불행히도 현재 한국사회에는 신선한 충격을 줄만한 '신화(神話)'가 없다. 그래도 찾는다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이 아닐까 한다."
―최근 '무조건 퍼주기'식 북한 지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고, 남북정상회담 때에 비해 국민의 대북 감정도 싸늘해졌다. 현재 남북관계와 향후 전망을 어떻게 보는지.
"남북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고 남북 공존적 삶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이 필요하다. 21세기에 전개되는 동북아시아나 세계의 변화에 남북이 함께 주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는 중국의 중화주의와 일본의 팽창주의가 다시 한반도에서 충돌하고 있는 현실까지 감안하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 정부가 정권재창출에 실패한다면 '햇볕정책'도 일시 중단될 텐데, 그 기간이 길수록 민족 전체의 불행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
―북한이 신의주 특구 개발로 부분적 자본주의 도입을 선언하는 등 상당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연 북한은 어떻게, 얼마나 변화할까.
"북한의 변화는 어제, 오늘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이러저러한 고민과 모색 기간을 거쳐 나왔다. 당장 중국이 지난 20년간 겪은 변화를 북한에 기대할 수는 없지만, 오늘의 변화 속도와 폭이 안정상태에 들어가는데 5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본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과 국가, 지역성의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데, 세계화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세계화는 지역화 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세계화와 지역성, 민족의 문제를 다룰 때 원효의 철학 '비동비이'(非同非異)' '역동역이(亦同亦異)'를 떠올린다. 같음은 다름이 있어야, 다름은 같음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민족문화·예술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하지만 민족예술의 위대함을 말하면서도, 정작 무엇이 위대한지 모른 채 이를 박제화하는 경향을 지적하고 싶다. 나는 윤이상과 이응로에게서 민족예술의 미래를 본다. 오딧세이처럼 서양예술계라는 험한 바다를 항해하면서도 민족예술이 자기동일적 신화로만 남지 않고, 보편적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사회가 다양화하고 대중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이 줄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돈이 생기지 않으면 거들떠 보지 않는 것은 한국만의 현실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 큰 줄기는 민주화와 민족통일이다. 지식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계몽'의 첫 자리에서 외로운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계몽은 오성(悟性), 즉 머리가 아니라 용기와 결단이 부족해서 생긴 미성숙에서 해방되는 첫 걸음'이라는 칸트의 지적처럼 지식인들이 스스로를 깨우치는 작업이 선행될 때 대중도 계몽시킬 수 있다."
인터뷰를 마친 송 교수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여행이나 떠날까 했는데 베를린에 폭설이 내려 그 길마저 막혔다"고 했다. 그는 "고향 땅에서 환갑을 맞게 됐다며 좋아했던 아내에게 가장 미안하다"면서 "남과 북 어느 한쪽을 택하지는 않겠다는 나의 신념대로라면 둘 다 버려야 할 텐데, 정녕 그 길 밖에 없는지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송두율교수는 누구/ 獨서 활동… 수차례 訪北
송두율 교수는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독일에 유학, 하이델베르크대학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 사회학, 경제사를 공부했다. 72년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 아래 철학박사 학위를, 82년 뮌스터대학에서 사회학 교수 자격을 받았고, 현재 뮌스터대 교수로 있다. 74년 재독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초대 의장을 맡는 등 반독재 투쟁을 펼치면서 '친북 인사'로 분류돼 귀국길이 막혔다.
91년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첫 방북 뒤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95년부터 베이징에서 북한 학자들과 학술회의를 열어왔다.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이 장기화하면서 93년 국적을 독일로 바꿨다. 우리 말 저서로 '역사는 끝났는가' '21세기와의 대화'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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