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0월16일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겸 문학이론가 가스통 바슐라르가 78세로 작고했다. 바슐라르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별난 이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대학 교수나 지식인들이 부르주아 가정 출신인 데 비해 바슐라르는 구두 수선공을 할아버지로, 담배 소매상을 아버지로 두었다. 가난 탓에 그의 학업도 길게 우회했다. 샹파뉴 지방의 바르쉬르오브에서 태어난 바슐라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우체국 직원으로 일했다. 세월이 흘러 파리로 발령을 받게 되자, 그는 주경야독으로 띄엄띄엄 제도 교육의 계단을 올라가 마침내 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바슐라르가 과학사학자 아벨 레의 뒤를 이어 디종 대학 인문학부 교수가 된 것은 46세 때인 1930년이었다.바슐라르는 과학철학과 문학적 상상력 이론이라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분야에서 동시에 깊은 성취를 이뤄냈다는 점에서도 별나다. 더구나 그 둘은 그가 보기에 엄격히 분리된 영역이 아니었다. 바슐라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시를 즐겨 읽었지만, 그가 거기서 끄집어낸 것은 이성의 파괴가 아니라 해방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성에 소란스러움과 도발성이라는 역할을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연에 대한 앎은 바슐라르 일생의 업(業)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과학의 관점과 시의 관점에서 동시에 수행했다. 그 점에서 그는 데카르트가 나눈 것을 다시 붙이려고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도는 그 나름의 정신분석학에서 발원했다. 그 정신분석학은 칼 융의 '원형의 정신분석'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성애의 정신분석' 사이에 '이미지들의 정신분석'이라고 할 만한 오솔길을 만들었다. 그 오솔길을 걸으며 바슐라르는 사유의 물리학과 자연의 심리학을 동시에 실천하는 시인 겸 사상가가 되었다.
고종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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