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한운성(56·서울대 교수)은 화폭에 과일을 채집하면서 문명을 비판한다. 그는 21세기 문명을 바라보는 꼭지점으로 과일을 선택했다. 25일까지 서울 관훈동 노화랑(02―732―3558)에서 열리는 '과일채집' 전은 머잖아 사라질지도 모르는 지구상 생명체의 본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두려는 작가의 기획이다.대부분 무채색의 어두운 바탕에 사과 석류 감 수박 등등 과일이 통상적 정물화와는 달리, 꼭지 부분에 초점이 맞춰 그려져있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마치 세기말적인 어떤 징후를 암시하는 것같다. 그러나 과일의 꼭지로 시선이 옮겨지면서 작가의 의도가 읽혀진다. 생명의 근원인 나무와 붙어있던 '생명성'이 바로 꼭지이다. 작가는 "21세기를 조망하건대 분명 유전자 조작이라거나 생명 복제라는 단어가 컴퓨터라는 단어만큼이나 인간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요즘 원고지에 적힌 글을 보기 힘들듯이 오리지널한 생명체의 모습이 조금씩 그 자취를 감추리라는 생각에서 서둘러 '과일 채집'에 손을 댔다"고 말한다.
이전의 박제된 한국 호랑이, 눈먼 신호등, 얽힌 매듭그림 등에 이어 채집된 과일 시리즈로 작가는 문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비판정신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밝고 건강함을 잃지 않는 그의 풍자는 철저한 조형정신, 현실과의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감에서 비롯된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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