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수첩이문재
젊은 의사가 천천히 걸어 보라 해서
신도시 외곽을 느리게 걷는다
운동화 끈 매듭 아직도 낯설고
햇빛마을이며 샘터마을 오전에만 고요하다
애완견들이 놓고 간 황금색 똥 피하느라
먼데 강 건너는 바라보지 못하고
빈집으로 돌아와 국수 말아먹는다
숨가쁘던 스무살 시절 낮꿈이 계면쩍어
다시 운동화 신고 문을 여는데
후끈 열기처럼 들이닥치는 서녘 붉은 하늘
심호흡하며 오전에 걷던 길 끝을 찾다가
말개지며 높아가는 하늘을 보았다
그래 그래 그래 날갯짓하며
기러기 편대들 북북서진하고 있다
운동복 주머니에서 꺼내든 낡은 수첩
잉크 자국 파랗게 번져 있는 전화번호 몇 개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 그래 그래
●시인의 말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자꾸 마음이 쓰인다. 어떤 날은 혼자 어두운 거리 모퉁이를 돌아서다가 기억력이 삶의 전부인 것 같아 등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약력
1959년 경기 김포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 시편" "마음의 오지" 등 소월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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