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야인시대'의 시청률이 50퍼센트를 넘본다는 소문이 들린다. '틀어져 있으니 본다'가 아니라 '시간 기다려 가며 본다'는 정도가 되어야 시청률 50퍼센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학원 가랴, 인터넷 게임 하랴, 평소엔 바빠서(?) 그 시간에 TV를 보지 않던 중학생 아들 녀석이 예약녹화까지 부탁하는 걸 보면 이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한 프로그램에 대한 충성도가 조사 대상의 절반을 넘으려면 남녀노소 중 남(男)과 소(少)를 잡아야 한다. '야인시대'의 무엇이 '바쁜' 이들을 사로잡았을까. 대중은 행복한 이야기보다 성공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행복이야 평화로운 시대에 유복한 가정에 건강하게 태어나는 걸로 족하다.
그러나 성공은 다르다. 성공에는 게임적 요소가 필수다. 반드시 성공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에 동행하거나 곁에서 숨 죽이며 지켜보는 일이야말로 흥미진진한 체험이다. 춘향이가 '결격 사유' 없는 신분으로 태어나서 이 도령 만나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면 이야기로서는 영 재미가 없다. 심청이가 장애인 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지 않고, 홍길동이 호부호형 제대로 하며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자리 올라 오래오래 살았다면 그들의 삶을 굳이 무슨 재미로 지켜보겠는가.
감동 받으려고 드라마를 보는 사람보다는 재미있으니까 드라마를 본다는 사람이 훨씬 많다. 깨달음은 즐거움의 문을 통과한 후에 만나게 될 경우 그 외연(外延)이 더 커진다. 살펴보니 재미있는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묘하게 알파벳 C로 시작할 수 있는 단어들로 요약할 수 있어서 나는 그것들을 '재미의 4C'라고 부른다. 매력 있는 인물(Character), 그를 둘러싼 갈등(Conflict),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도전(Challenge), 그것이 과연 성공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유발(Curiosity)이 그 목록이다. '야인시대'에는 이 드라마틱한 4가지 요소가 골고루 포진해 있다.
무료하거나 피곤한 사람들을 TV 앞으로 끌어 모았으니 '야인시대' 제작진은 '성공'의 대열에 합류한 것인가. 피를 튀기고 몸을 날리는 '서늘한' 화면은 잠자던 폭력 욕구의 대리 충족일 수 있다. 차력술만 실컷 보여준 후 정작 약은 팔지 못하고 구경꾼들을 되돌아 가게 만드는 약장수의 처신은 자칫 숫자의 마술에 빠지기 쉬운 드라마 제작진에게 반면교사다. 50퍼센트의 운집은 50퍼센트의 책임을 동반한다.
팝 가수 릭 에슐리가 부른 노래 가운데 '더불어 영원히'(Together Forever)라는 게 있다. 이 두 가지야말로 드라마를 포함한 대중문화의 건강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발표(방송)된 당대에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지거나 오히려 낮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라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베스트셀러가 스테디셀러가 되려면 그 작품 내면에 인류 보편의 가치가 살아있어야 한다.
'야인시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야인의 몸이 아니라 야인의 정신이다. 몸만 야인이라면 그건 야만인에 불과하다. 대학 교양학부 시절에 읽은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수필 '야인정신'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있었더냐 없었더냐가 문제 아니다. 없었다면 없을수록,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전해오게 되는 데 그 사실을 뛰어넘은 진실성이 있다. …(중략) 사실(事實)은 사실(史實)이 되어야 하고 사실(死實)에 이르러야 한다."
나는 김두한의 의리나 용맹보다는 그의 분노에 주목한다. 그의 분노는 이기적인 분노가 아니라 이타적인 분노다. 지금 국회에서 터져 나오는 욕설과 고함이 누구를 위한 분노에서 연유한 것인지 가늠한다면 세상을 노려보는 김두한의 고상한 분노에 잠시 고개가 숙여질 것이다.
주 철 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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