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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옛 여인들 행동제약 속에도 수준높은 삶 꾸려"/'우리 옛 여인들의 멋과 지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이 성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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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옛 여인들 행동제약 속에도 수준높은 삶 꾸려"/'우리 옛 여인들의 멋과 지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이 성 미

입력
2002.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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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여자는 남자의 종속적 존재로 취급되어 왔지만 조선시대 사회의 남녀차별은 우리나라의 다른 어떤 시대와 비교해 보아도 극심했다"고 강조한다. 조선 세조 때 편찬된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형전(刑典)'에는 사족(士族)의 부녀들이 산간이나 물가에서 노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어기는 자는 매 100대의 벌을 받는다고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여성의 대외 활동을 제약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삼종지의(三從之義)에 대한 강조, 안채와 사랑방을 엄격하게 구분한 가옥 구조 등에서도 남녀차별적 요소를 찾는다.반면 신라 초기에는 2대에 걸쳐 여왕이 집권했으며, '처용가'에서 아내의 불륜이 소재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여성의 삶이 조선시대보다 자유로웠을 것으로 이 교수는 추측한다. 또 고려시대만 해도 출가 여성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남자 형제들과 똑같이 분배받았으며, 젊은 여인이 과부가 되면 재혼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고려 공민왕 때 명승 나옹화상이 법회를 개최했는데 수많은 여인들이 광란적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나라에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순찰을 동원한 적이 있어요. 또 고려 말에는 상류층 여인들이 남편의 출세를 도우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권세 있는 고관들의 집으로 찾아가는 일이 많았다는 기록도 나오지요."

그는 책에서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난설헌(許蘭雪軒) 황진이(黃眞伊) 외에도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빙허각(憑虛閣) 이씨(1759∼1824)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 죽향(竹香·19세기 중엽) 등 6명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소개하는데, 이 중 신사임당을 가장 애착이 가는 여인으로 꼽는다. 남녀 화가를 통틀어 그녀가 남긴 회화는 당시 회화 양식을 알려주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는 것. 빙허각은 술과 음식, 바느질과 길쌈, 건강 등 집안에서 여자가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격 책인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저술한 작가. 저자는 이를 두고 "실생활의 여러 측면을 포함해 각 분야의 역사, 실생활에 적용하는 방법까지 다룬 책을 조선 후기 여인이 집필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백과사전류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를 집필한 서유구가 그의 시동생으로, 빙허각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저자는 추정한다. 이 교수는 임윤지당을 남자들만의 성리학 세계에 도전한 드문 인물로 소개한다.

이 책에는 특히 기녀 죽향의 그림 세계가 처음 일반에 공개된다. 죽향은 조선시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오른 인물로 이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서 그의 그림을 찾아내 책에 소개했다.

이름 없는 수많은 여인들이 만든 자수와 바느질의 아름다움도 소개된다. 이 교수는 "옛 여인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미감을 유감없이 발휘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설명한다. 특히 책에는 국왕의 결혼의례 전범을 담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1759)'에 기록된 하층 여인들의 이름이 소개된다. "침선비(針線婢)라 불리는 이들은 남성 장인(匠人)들과 달리 성이 없이 이름만 기록되어 있어요. 초정(草貞) 행화(杏花) 두매(斗梅) 등이 그 예인데요, 당시 조선시대 하류계층 여인들을 성이 없이 이름만 불렀던 풍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예요."

그렇다면 이 교수가 보는 우리 옛 여인들의 멋과 지혜는 무엇일까. "내실(內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으며 살아오면서도 우리의 옛 여인들은 문학과 회화, 서예, 학문 등에서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고 문화적으로 수준 높은 삶을 꾸려나갔다는 점이 감탄스럽습니다."

이 교수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회화사 전문가로, 1992년 봄 뉴욕 IBM 갤러리에서 한국 전통의상전을 열었고, 1998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한국미술관 설치작업에서 자문역을 맡는 등 우리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데 노력해 왔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사진 조영호기자

● 이성미교수는 누구

이성미 교수는 미술사학자로 이름나 있지만 정작 본인은 "내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다"고 조선여인처럼 말을 한다. 설명을 들으니 딴은 그렇다.

이 교수의 선친은 역사학계의 원로인 남운(南雲) 이홍직(李弘稙·1909∼1970) 옹이다. 동경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그는 연세대 고려대 등을 거치면서 후학을 양성했고, 고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 일제 때 빼앗긴 문화재 반환에 힘써왔다.

남동생은 이성규(李成珪·56)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언니는 이순자(李淳子·64) 숙명여대 명예교수(문헌정보학), 이순자 교수의 남편은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때 작고한 김재익(金在益)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다. 그리고 이 교수의 남편은 외무부 장관을 지낸 한승주(韓昇洲·62) 고려대 총장서리다.

"어릴 때 정양모(鄭良謨), 최순우(崔淳雨) 선생님이 집에 자주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분들은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남운 딸'이라고 부르곤 했어요. 그랬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누구의 부인, 처제, 동생, 누나로 불려 온 거예요."

이 교수는 "어떤 때는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느낀 적도 있다"며 가벼운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지만 덕성여대 박물관장과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자신 만의 길을 걸어 왔다.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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