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지미 카터(78) 전 미국 대통령은 집권 시에는 '최악의 대통령', 퇴임 후에는 '최고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역설적인 평가를 받아왔다.그가 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인권과 빈곤퇴치를 위한 그의 헌신적인 민간 활동이 주된 배경이 됐다. 1981년 56세라는 '젊은 나이' 로 퇴임한 카터가 재임 중 거뒀던 주목할 만한 성과는 1978년 30여년 동안 단절돼 왔던 중국과 미국 간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협정인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성공시킨 것이 사실상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 인권대사로서의 활약은 다음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패배한 이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82년 비정부·비영리 기구로 설립한 카터 재단을 이끌면서 '평화 가꾸기' '질병과 싸우기' '희망만들기'를 3대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철저히 정치색을 배제한다는 초당적 원칙은 카터 재단을 비정부 민간단체의 모범으로 끌어올렸다.
집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사랑의 집짓기 운동(Habitat for Humanity)'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8월 이 활동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올 6월에는 남아공 더반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지미 카터 특별건축사업(JCWP) 2002' 사업을 출범시켰다. 카터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한 4,5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은 남아공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18개 국가에 올해 말까지 1,000여 채의 집을 지어주는 사업을 벌여나가고 있다.
사랑의 집 못지 않게 카터가 유명세를 타게 된 데는 조지 W 부시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빼놓을 수 없다.
노벨위원회가 이날 "카터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현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이례적 언급을 한 것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올 1월 연두교서에서 터져 나온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미국 전역이 강경보수로 회귀하는 상황에서 그는 "지나치게 단순한 발상에서 나온 비생산적인 것"이라며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야당인 민주당조차 발언 수위에 놀랐을 만큼 그의 발언은 국제사회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인권, 중동정책, 대 이라크 확전 등도 구체적 논의없이 즉흥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일침을 가했다.
지난달에는 부시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쿠바를 방문,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얼굴을 맞댔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미국 전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한 그는 수많은 쿠바 시민을 앞에 놓고 미국에게는 교류와 봉쇄해제를, 쿠바 정부에는 인권과 민주화를 강도높게 주문했다. 수십명의 쿠바 반정부 인사를 만나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그의 파격적인 일정에 대해 쿠바 정부도 고개를 저을 만큼 그의 행보는 대담했다.
열렬한 야구팬이기도 해 7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노사분쟁 중재자로 나서기도 했던 카터의 수상은 최근 평화상 무용론이 부상할 만큼 신뢰성에 상처를 받은 노벨평화상에 모처럼 단비 역할을 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金대통령 "수상 축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11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카터 전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한반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면서 "한국 국민들은 그의 수상에 특별한 감회를 갖고 축하해 마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 카터와 한반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 깊고도 질긴 인연을 갖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카터라는 이름을 들으면, '미군 철수' 와 '핵 위기'를 연상하고 그 위에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김일성(金日成)주석을 오버랩시킨다.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건 카터는 1977년 취임 직후 주한 미군 철수를 추진, 박 전 대통령과 갈등하게 된다. 미군 철수론은 민주화와 인권을 억누르는 박 정권에 대한 카터의 반감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이 문제는 79년 6월 서울 한미 정상회담 개최 이전까지 2년여 간 한미 관계를 파행으로 몰고 갔다. 결국 철수론은 미 군부 및 공화당, 한국 정부의 강한 반대로 철회됐고, 카터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던 박 전 대통령은 회담 4개월 후 부하의 총탄에 숨을 거둔다.
꼭 15년이 흐른 94년 6월 전직 대통령 카터는 평양으로 향했다. 북한의 핵확산 금지조약(NPT) 탈퇴 후 조성된 한반도 핵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카터는 대동강 하구 서해갑문 앞에서 김 주석 전용 요트를 타고 회담을 벌여 핵사찰 수용이라는 중재안을 도출했다.
또 같은 해 8월 남북정상회담 개최라는 수확도 얻었다.
카터는 80년대 초반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구명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한국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최근에는 한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방한해 직접 집을 짓기도 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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