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를 움직인 이 책]미우라 아야꼬 "빙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를 움직인 이 책]미우라 아야꼬 "빙점"

입력
2002.10.12 00:00
0 0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의 '빙점(氷點)'을 처음 읽은 것은 감수성 예민한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평소 원수의 자식도 키울 수 있다고 장담하던 어떤 남자가 자기 딸을 죽인 도둑의 딸을 입양해서 키우게 된다. 그러나 막상 아이가 커가자 부모의 심사는 복잡해지고, 아이의 오빠마저 여동생을 사랑하면서 갈등은 심해진다. 뒤늦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여자아이는 절망한다. 나는 이 슬픈 이야기를 밤새워 훌쩍대며 읽었지만 세월이 가면서 그냥 잊었다.스무 살이 되던 해 내가 양자로 입양된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큰아버지가 안 계신 큰집으로 아버지가 나를 낳자마자 보낸 것이었다. 할머니와 큰어머니, 그리고 낳아준 생모(이때까진 작은 엄마라고 불렀다)야 당사자들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큰집의 두 누나와 작은 집의 두 남동생까지도 이미 오래 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가족 모두가 침묵을 지킨 것이었다.

나는 내가 몰랐던 세월에 대해 당혹스러웠고 철없이 행동했던 그 많은 날들이 참담했고 앞으로 낯설게 다가올 날들이 두려웠다. 나는 한달 내내 술만 퍼 마시다가 이불 한 채를 달랑 둘러메고 만화가 이정민 선생님 문하에 입문했으니 그것은 가족으로부터의 도피였다. 그리고 3년을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했고 신인 만화 작가로 등단은 했지만 고생문이 아가리를 쩍 하니 벌리고 있었다. 만화를 그리고는 있었지만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 하나 없고 가슴에서 우러나는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 흉내나 내는 꼴이었으니까 생활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느 날 후배 박원빈군이 표지도 없이 너덜너덜한 책 한 권을 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다.

"형님, 이 책 재미있습디다. 한번 읽어 보슈." 시큰둥하게 받아든 책이 바로 '빙점'이었고 중학교 때 읽은 책이라 마지못해 받았다. 며칠 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소일 삼아 던져두었던 책을 읽었는데 나는 벼락을 맞은 듯이 얼어붙었다. 세상에서 자신의 얘기보다 더 가슴으로 정직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야기는 결국 껍데기일 뿐이고 살아 숨쉬지 못하는 캐릭터는 종이 인형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내 얘기를 쓰기 시작했다. 당연히 주인공은 나였고 그 이름은 까치였다. '5계절'이란 만화였다. 이렇게 탄생한 까치는 이현세 만화의 영원한 영웅으로서 지금도 살아서 펄펄 뛰어다니고 있다.

누구나 책을 읽는다. 하지만 그 만남의 시간은 누구도 모른다. '빙점'은 첫 만남에서는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 내게 모든 것을 주었다. 누구에게나 한 번은 이런 만남이 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책은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읽어도 좋다.

이현세 만화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